지난 10일 제주 4·3사건 희생자 행방불명인 개인표석 관련 토론회를 보고 느낀 소감을 유족으로서 건의하고자 한다.

제주 4·3평화공원에는 행방불명인 뿐만 아니라 희생자 전원에 대해 표석(비석)을 설치해야 한다. 4·3평화공원 기본계획에도 추모광장에 각명비 설치가 논의된 바 있다.

제주4·3특별법 제8조(위령사업)에 ‘희생자를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며…’라는 기본방향을 정했듯이 4·3공원 조성은 위령공원, 역사공원, 문화공원 모두의 기능을 갖춰야 함이 당연하다.

위령만을 위한 공원이 돼서는 안되며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건별 내용이 담긴 비석을 설치하고 4·3의 기억을 역사화할 수 있게 희생자 전원에 대한 역사의 진실을 담아낸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1인1기의 비석은 충혼묘지와 같은 분위기를 줄 수 있으므로 희생자의 이유별 ‘군집 단일형’ 으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고된 1만4373명중 4·3행방불명인은 진혼제 때 초혼시 이름이 밝혀진 3844신위는 11곳의 형무소별 군집비석으로, 나머지 1만여 신위는 신고당시 6하원칙에 의해 기재된 사망경위를 참고해 사건별로 비석군을 설치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건의한다.

왜냐하면 1990년 6월 4·3유족회가 출범할 때만해도 4·3특별법 제정을 위해 이구동성으로 합심해 서명에 참여했던 유족들인데,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된 후에는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주4·3사건행방불명인유족회’ ‘한국전쟁당시예비검속피학살제주연합 유족회’ ‘대한민국건국희생자유족회’ 등 당시 불안정국을 대변하듯 사건의 시기와 유형별 유족회들이 결성됐다. 외형적으로는 하나의 4·3유족회라고 할 수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보는 시각에 따라 4·3을 ‘사건이다’, ‘항쟁이다’ 하는 반면 아직도 ‘봉기다’, ‘폭동이다’라는 비판적 시각차가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이 이러하듯 이질적 유족들이 있음에도 유족회별 충분한 논의없이 4·3평화공원은 12만평이라는 작지 않은 부지임에도 103평만의 위패봉안실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희생자 이름만을 일률적으로 나열해놓고 합동위령장소라 했으니 희생자 현황은 될 지 모르지만 억울한 영혼을 어떻게 제대로 해원할 수 있으며, 비판적인 시각차가 있는 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혼합돼 있다고 할수 있으니 어찌 화합된 추모의 장이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사건별로 희생경위와 장소 등 진실을 담아낸 비석군을 공원내에 설치하고 서로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당시의 시대적 아픔을 같이한 모두가 희생자임을 이해할 수 있게 조성돼야만 4·3평화공원은 증언의 자리, 해원의  자리, 참회의 자리, 용서의 자리가 될 수 있고 후손들에게도 올곧게 4·3의 슬픈 역사를 전해줄 수 있는 역사공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신하 / 백조일손 유족회 고문>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