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편] 초토화작전(하) 사태의 유혈기(1948.10.20~12.31)
[제3장] 초토화작전 ③ - 涯月面

8. 군, 금품갈취후 입막음 총살(上加里)

98.11.20 제432회
* 上加里

애월면 상가리에 처음으로 '난리'가 난 것은 4·3이 발발한지 무려 7개월이나 지난 후인 48년 10월 말께였다. 10월 27일과 29일, 수확 철을 맞아 밭에서 일하던 주민 4명이 그 즈음 중산간마을에 대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펴던 군인들에게 걸려 무차별 총살된 것이었다.

이들 사건은 10월 27일 벌어진 무장대의 애월지서 습격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당시 응원경찰로서 애월지서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회고록을 통해, "송요찬 9연대장의 '제3차 토벌작전'이 10월 29일 개시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고내봉 뒤쪽에 자리잡은 중산간마을 상가리는 전체 가호수가 불과 210호 가량인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 이름난 무장대원도 없었다. 주민들은 4·3 발발 이후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보았지만, 그간 큰 사건없이 비교적 평온했기 때문에 10월말께 벌어진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며칠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숨을 곳을 찾아 전전긍긍하던 청년들에게 '마을을 방위하라.'는 토벌대의 명령이 내려졌다. 낮에는 토벌대가 무서워 도망 다니고, 밤에는 무장대의 식량 요구에 시달리는 등 양자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던 평범한 주민들에게 이 명령은 처음으로 접한 '행동지침'이었다. 한 주민은 "그 무렵 애월국교에서 열린 집회에 마을대표로 참석했는데, 그때 한 군인이 '이제부터는 계엄령이다'고 말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1948년 11월 13일에는 '원동(院洞) 마을'에서 군인들에 의한 집단학살극이 벌어졌다. 원동은 내(川)를 경계로 소길리와 상가리로 나뉘는데, 이때 상가리 지경에 살던 김기용(金己用, 60) 김승홍(金丞洪, 58) 김길홍(金吉洪, 49) 김유홍(金有洪, 40)이 희생됐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 사건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원동마을 일부가 행정구역상 상가리에 포함되긴 하지만 마을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날에는 원동마을 뿐아니라 이웃마을 하가리에서도 집단학살이 벌어졌으나 상가리만은 무사했다. 이날 길 가던 상가리 주민 양계초(梁啓超, 44)가 애꿎게도 토벌대의 눈에 띄는 바람에 원동까지 끌려가 함께 총살됐으나 이는 돌출적 사건으로서 상가리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다.(원동마을 학살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소길리·하가리 편' 참조).

더구나 상가리는 그 즈음 중산간마을에 내려진 소개령에서도 제외됐다. 중산간마을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는 결정적인 행운이었다. 주민들은 상가리가 소개령에서 제외된 까닭을 탁종민(卓鍾民)이라는 중대장 때문이라고 여겼다.

중위 계급의 탁종민은 제주읍 외도국교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중대장이었다. 당시 9연대는 애월면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은 채 동부지역은 제주읍 외도리 주둔군이, 서부지역은 한림면 한림리 주둔군이 각각 관할케 하고 있었다. 탁종민은 상가리의 예쁜 처녀를 골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처녀의 가족들은 속으로는 끙끙 앓았지만 겉으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어쨌거나 탁종민과 상가리의 인연 덕분에 같은 중산간마을인 이웃 납읍리는 소개됐어도 상가리는 소개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벌대의 영향력 아래서 한동안 평온을 유지하던 마을은 1948년 12월 11일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해 주민 4명을 살해하고 가버린 후 곧이어 토벌대의 보복총살극이 벌어짐으로써 다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날 무장대는 변유찬(邊有燦, 60) 변여찬(邊汝燦, 20) 등 일부 주민을 지목해 학살하고 이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또한 보초를 서던 강윤길(姜允吉, 50대), 변병찬(邊柄燦, 25)과 맞닥뜨리자 이들도 살해했다. 무장대가 지목한 변유찬은 변두남(민보단장)과 변봉남(경찰)의 부친이었다. 그리고 변여찬은 경찰에 협력한다 하여 지목한 것이었다. 변유찬의 며느리 강옥생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했다.

밤에 갑자기 폭도들이 들이닥치자 나는 인근의 대나무 밭에 급히 숨었지요. 그러나 시아버지는 미처 숨기 전에 폭도들에게 잡혀 잔혹하게 희생됐습니다. 당시 남편(변두남)은 군인들 마중을 간 상태였지요. 폭도들은 집에 불도 질렀습니다. 곧 군인들이 와서 주민들에게 '당장 이 집의 불을 끄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니 모두들 나와서 불을 껐습니다만 이미 다 타 버린 후였지요. 남편이 민보단장이고, 시아주버니가 경찰이라 하여 우리 집을 지목한 겁니다. 날이 밝은 후 시아주버니가 경찰 차를 타고 와서 시아버지를 묻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군인들은 무슨 정보를 들었는지 이미 마을 외곽에 매복해 있던 중이었다. 주민 강상문 옹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나는 보초를 서던 중 '섯거리'라는 곳에 인기척이 난다는 정보를 듣고 민보단원을 이끌고 갔었지요. 그런데 그들은 잠복하고 있던 군인들이었습니다. 1개 분대 정도의 병력이었는데 중대장도 있더군요. 그래서 그냥 돌아오는데 그 순간에 폭도들이 마을 동쪽으로 습격해 변유찬 씨를 죽인 겁니다. 군인들이 매복해 있던 '섯거리'와 변유찬 씨의 집은 불과 100미터 거리입니다. 그런데 민보단장이자 변유찬 씨의 아들인 변두남 씨가 급히 군인들에게 신고했지만 군인들은 겁이 났는지 직접 달려오지 않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수백발 쏘면서 마을 외곽을 빙돌아서 접근했습니다. 그때는 폭도들이 이미 물러간 후였지요. 그런데 그게 다행이었습니다. 왜냐면 총소리가 나니까 주민들이 집에 들어가 숨었는데 만일 군인들이 직접 접근했다면 길에 나와있던 애매한 사람들이 대거 희생됐을 겁니다. 군인들은 폭도들이 가버린 후 양 아무개씨의 가족을 지목해 학살했습니다. 집안에 행방불명된 청년이 있으니까 '폭도 가족'이라 몬 것이지요. 또 날이 밝자 누가 무슨 혐의를 씌웠는지 강익홍(姜益弘, 28)과 양치규(梁致奎, 23) 등 3명을 끌어내 총살했습니다.

무장대 습격사건의 여파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군인들이 청년들을 골라내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외도국민학교로 끌고간 것이었다. 끌려간 청년들 중 12월 17일 외도지서 인근 밭에서 희생된 사람은 강원식(姜元植, 39) 양군욱(梁君旭, 27) 양상보(梁祥寶, 25) 강현옥(姜鉉玉, 24) 변두찬(邊斗燦, 22) 양치숙(梁致淑, 22) 등이다. 이날엔 이웃마을 고내리 주민 40여명도 함께 희생됐다.

이날의 희생에 대해 토벌대가 노획한 문서에 거명된 주민을 잡아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일부 주민을 고문 취조한 끝에 확보한 명단을 토대로 청년들을 끌고 가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이즈음이 교체를 앞둔 9연대가 '전과 올리기'를 위해 무차별 학살극을 벌이던 때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주민들을 끌고 간 사람은 탁종민 중대장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민 희생은 교체된 2연대가 주둔한 후에도 이어졌다. 1949년 1월 24일 안덕면 직원들을 태운 트럭이 애월면 하가리와 고내리 사이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한 보복학살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날 피습사건이 발생하자 군인들은 즉각 하가리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군인들은 하가리에서 별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일부를 상가리로 보냈다. 상가리에 온 군인들은 상가리 이장집 등 몇몇 집을 불태우고 양계생(梁癸生, 57) 변창래(邊昌來, 28) 등 주민 2명을 마을 중심으로부터 다소 외진 동네인 속칭 '빌렛가름'으로 끌고 가 총살하면서 빌렛가름도 불질렀다. 왜 군인들은 주민 2명을 총살했고, 하필 '빌렛가름'을 불태웠는가. 앞서 증언한 강상문 옹의 집도 일부가 이때 불에 탔다. 강 옹은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 군인 5명이 상가리로 왔습니다. 이들은 우리 집과 이장 집을 대표로 불질렀습니다. 이장과 마을 유지에게 상징적으로 책임을 물은 것이지요. 우리 집은 14대 조상부터 한 곳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곳입니다. 한 경찰이 나서서 군인들을 말린 덕에 불을 간신히 껐습니다. 그런데 그날 군인들은 변창래 씨를 붙잡아 몸을 뒤진 끝에 돈이 나오자 이를 갈취하고 그 사실을 입막음하기 위해 빌렛가름까지 끌고 가 죽였습니다. 양계생 씨의 경우는 폭도들에게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집 마당을 파서 식량을 숨기던 중이었는데 군인들은 오히려 '폭도에게 식량을 올려 보내려고 한다'면서 함께 끌고가 총살했습니다. 군인들은 외진 동네인 빌렛가름으로 끌고가 총살을 하면서 괜히 그 마을을 불질렀습니다.

돈을 갈취하기는 희생자 양계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양계생의 아들은 "나는 그날 토벌에 동원돼 송당리까지 다녀왔는데, 돌아와보니 부친이 이미 돌아가셨다."면서 "군인들은 부친을 학살한 후 집을 전부 뒤져 돈도 가져갔다."고 말했다.
1949년 봄 무장대가 점차 궤멸됨에 따라 사태가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무장대의 습격이 잇달아 벌어졌다. 한 주민은 이후 8∼9차례 무장대의 습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잔여 무장대의 약탈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무장대는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보초 서던 주민들과 맞닥뜨리면 즉각 살해했다. 이는 무장대가 일부 주민을 지목해 살해한 앞서의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사건이었다. 이때 보초 서다 무장대에게 희생된 사람은 강원용(姜元用, 44) 변승종(邊承宗, 40) 양경춘(梁庚春, 39, 아명 양치후) 양석찬(35) 강태인(姜泰仁, 24) 변대규(邊大奎, 24) 등이다. 희생자들은 주로 산에서 내려오는 길목인 마을 동쪽의 속칭 '곰방이동네' 주민들이었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도 그치지 않았다. 이후에도 토벌대는 걸핏하면 주민들에게 혐의를 씌워 끌고 갔다. 이때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양승두(梁承斗, 27) 양치선(梁致善, 27) 양치수(梁致洙, 23)는 한국전쟁 후 행방불명됐다.

한편 주민 강태수(姜泰洙, 39)는 토벌대의 지로인(指路人) 역할을 하다 희생됐다. 강태수가 희생된 사건은 이른바 '노루오름 전투'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군인들은 산길을 잘 아는 주민들을 앞세워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는데 무장대의 매복에 걸려 희생됐다.

이 '노루오름 전투'는 군인들이 대거 희생된 데다가 당시 토벌작전에 동원됐던 애월면 관내 주민들의 입을 통해 널리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때 대대장을 비롯해 중대장 등 군인 여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벌어진 날짜가 불분명하다. 군·경의 자료가 공개돼야 정확한 사건 날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건의 경우 해당 읍·면의 충혼묘지에 세워진 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애월면 충혼묘지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토벌대 안내인 강태수의 희생일자로 사건날짜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강태수의 아내는 남편의 제사를 음력 2월 8일에 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이 만일 1949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양력으로는 1949년 3월 8일의 일이지만, 어느 해에 벌어진 사건인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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