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9월10일 우리나라 유괴범죄 사상 첫 번째 희생자는 당시 다섯살 된 조두형이다. 유괴 장소인 서울 마포구 공덕동 집근처에서 행방불명된 후 3일 만에 협박전화가 왔다. 돈 20만원을 장위동 초등학교 부근 전신주 밑에 묻으라고 범인전화가 왔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범인도 검거하지 못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담 수사관만 해도 300여명에 이르렀다. 수사가 점점 미궁에 빠지자 중앙행정기관, 사회단체 등 온 국민이 나섰지만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사건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희대의 사건이었다. 이사건 이후 다시 온 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모 중학교 담임교사가 제자를 유괴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충격은 너무나 컸다. 교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비탄이 소리는 결국 어린아이들을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안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유괴사건이 조기에 해결 안 되면 화살은 경찰로 향하면서 전국매스컴은 ‘무능경찰’을 지적하여 나선다.

당시만 해도 수사 장비는 형편이 없었다. 따라서 육감수사나 발품으로 범인을 잡던 중세시대적 수사였다. 그 사건 이후 반세기가 지나가는 지금에 수사 장비는 많은 발전을 거쳐 첨단화됐다. 거짓말 탐지기를 시작으로 현재 과학수사기법의 최고봉인 유전자(DNA)감식법은 범인검거에 효과가 많았다.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유괴사건이 있었다. 온 국민의 살아있기를 두손 모아 빌었던 양지승 어린이가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사실 사건전모가 밝혀지면서 경찰의 수사가 도마 위에 올랐다.

수사 기본인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신문, 방송보도와 국민의 질타에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경찰의 허탈한 심정을 어디가서 하소연할까. 하지만 한 달 넘게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그 열정은 부실한 수색 논란으로 범인을 잡고도 빛이 바랬다.

그러나 도민들은 경찰을 믿는다. 전국 상위권에 드는 제주경찰이 있기에 더욱더 믿음이 간다. 돈과 성적대상으로 유괴살인행위는 국민의 적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교훈 삼아 유괴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민생치안에 전위대가 되어야 한다.<송순강 T.M.S 녹산(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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