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배 탐라대 교수

   
 
  ▲ 이규배 탐라대교수  
 
제주가 참 스산하다. 정권 벽두에 터진 4·3위원회 폐지논란은 ‘잃어버린 60년’을 치유하려는 제주인들에겐 공공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교과서도 아닌 것이 참고서도 아닌 것이 무늬만 ‘대안교과서’의 ‘제주4·3=좌파 반란’ 파동은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망동으로 살과 치를 떨리게 했다. 그래서 4·3은 항상 되돌아봐야 하는 기억이며, 언제나 되씹어봐야 하는 교훈이 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4·3의 정신은 더도 덜도 아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온전히 담겨있다.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 공권력의 진공지대였던 1948년의 제주도, 고립무원의 섬, 재판·변호·보호 없는 살상의 처형도 제주, 그래서 제주인들은 자위권 발동의 수단으로 저항에 나섰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들은 ‘방화’에 나섰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봉화’로 맞설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탄압이면 항쟁’이라고 절규했던 것이다.

단단히 무장한 공권력과 대치한 제주인들은 대부분 적수공권이었고 그나마 손에 잡은 건 낡은 소총에다 원시적인 죽창과 도끼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건 내란도 반란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외롭고 처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희생자의 80%에 가까운 제주인들은 교전 중에 죽어간 것이 아니라 그건 ‘박멸’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인들은 침략자에 맞선 의병처럼, 탐학한 관군에 맞선 민병처럼 고귀한 가치를 지키려 했던 역사적인 의미를 남겼다. 그 하나인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은 생명·재산·자유를 위협하는 외부의 폭력에 대해 자주, 자결, 자위의 정의로운 의거이며 민주주의적 가치 수호를 위한 권리의 표현이었다. 또 다른 하나인 ‘단선·단정 반대’는 민족문제를 자주적으로 풀며 이를 저해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적 통일정신의 발로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제주4·3은 정치사회적으로는 평화로운 민주주의적 사회수호와 역사적으로는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지향했던 한국현대사 최초의 정의로운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규배, 탐라대 교수. 前 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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