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오름이야기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中)

눈을 떠보면 어느샌가 더 크고, 더 높아진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고 소소한 풍경들은 정겹고, 때론 특별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크고 높음이 즐비한 곳에선 종종 작고, 소소함이 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제주의 오름. 368개의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이 작은 산들은 오르는 이에겐 이미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비탈지고 가파름이 없기에 낙오할까 두려운 걱정이 앞서지 않는다. 오히려 발 끝에 와 닿는 폭신한 감촉이 오름이들의 걸음을 편안하게 인도한다.

산 능선이 완만하고 평탄하다 보니 예부터 제주인들은 소와 말을 방목했고, 오름 아래엔 마을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때문에 오름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묻어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산 곳곳에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내듯 제주의 오름 또한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 4·3의 아픈 기억, 삶의 시련과 흔적, 전설들을 오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오름을 오르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산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가을이 황혼으로 치닫고 있다. 이젠 제주의 오름에 올라보자.

오름은 오르는 이들을 구속하지 않기에 따로 정해진 등산로가 없다. 내 발길이 닿는 그곳이 바로 오롯한 나만의 등산로다. 입·하산 시간도 없어 촉박함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같이 오르는 이중 누눈가 이름 모를 꽃들에 한껏 정신이 팔려 있다면 그대로 두어라. 오름만에서라도 재촉하는 삶은 잠시 잊어도 된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일부러 훔칠 필요가 없다. 오르다 보면 어느새 오름을 감싸 돈 바람이 게눈 감추듯 닦아 준다.

지금 오름에 오르면 눈 앞에 펼쳐진 은빛 물결과 가을바람에 '사그락 사그락' 거리는 으악새 울음소리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필요한 준비물은 없다. 제주의 오름을 온몸으로 느낄 마음의 여유와 모든 산 오름이들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양심'만 챙기면 된다.

자. 작은 산, 오름으로 떠나자. 큰 감동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 이상민 기자lsm8251@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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