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닮은 힘찬 필체로 서단 견인
자유로우면서도 자신 낮추는 겸양의 미덕 붓 끝에 담아…후학 양성에 정진
나이 읽을 수 없는 활발한 창작활동·필법 전파 노력 한국 서예 발전에 일익

   
 
  故 현중화 선생.  
 

   
 
  故 현중화 선생.  
 

'존재감'만으로도 큰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한국 서단을 이끈 거장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소암 현중화 선생이 그렇다.

지난 1993년 8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힘찬 필체를 담아 전시회를 열면서도  "늘그막에 전시회를 갖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다" 며 말을 아꼈던 일화도 자주 회자된다.

소암은 정신이 자유롭고 겸양의 미덕이 있는 서예가로 정평이 나 있다. 사람들이 소암의 필법을 보면서 찬사를 보낼 때마다, 소암은 자신의 글씨가 "겨우 동이 틀락 말락할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몸을 낮췄다. 일의 경지를 스스로 뽐내지 않고, 언제나 일관되게 몸에 밴 겸양의 정신을 소암의 존재감에서 느낄 수 있다.

 

   
 
  현중화 작 '좌독'  
 

   
 
  현중화 작 '유근유공'  
 

소암은 1907년 제주도 서귀포 법환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소암(素菴), 녹담(鹿潭), 소암우인(素菴迂人) 등이다. 1940년 30세 때 일본 서도의 대가 마스모토 호우수이 선생에게 3년간 사사했고, 34세에는 마스모토 선생의 동문인 츠지모토 사유우의 문하에서 8년 동안 있으면서 육서체를 익혔다. 그 후 일본의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며 서예가의 입지를 다졌다.

45세 때인 1955년 제주사범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하여 제주대학교에서 논리학을 강의하는 강사를 역임하는 등 교편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도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국내에서 이름을 알린 계기는 51세가 되던 해인 1957년 국전에 '십오야망월(十五夜望月)'을 처녀 출품, 입선하면서부터. 2년 뒤에는 국전 추천작가가, 제11회 국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이 후 국전추천작가·국전초대작가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대가로서 인정을 받았고, 한국 서예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소암은 후학의 지도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66세(1972)때 제주 소묵회를 창립, 제주 서예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70세에는 목포 소묵회·71세에 서귀포 소묵회·72세 때 광주 소묵회·74세에는 대구 소묵회를 잇따라 창립하는 등 자신의 필법과 서도 정신을 전국으로 확대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소암의 교우는 동시대의 서예가, 고매한 스님들과 이루어졌다. 의제 허백련, 남농 허건을 비롯하여 손재형, 김충현, 김광추, 서옹, 탄허 스님 등이 그들이다.

당호(堂號)로 '녹담서원(鹿潭書院)' '조범산방(眺帆山房)' '탐라호루(耽羅胡樓)'라 하며 한라산 등 제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내비치기도 했다.

2008년 10월 서귀포시에는 소암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예술세계를 기리고 있다. 달이 차고 또 기우는 것처럼 인생 또한 뜨고 지지만, 그의 서도만은 언제나 찬란하게 시대를 비출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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