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질곡의 역사 붓 바꾸고 예술혼 불태워
화가 인생 첫 개인전중 4·3발발…이후 서예가로 방향 전환
회화적 강한 필선 먹선에 옮겨져 기운 생동의 행·초서 정평

   
 
   
 

영화 타이타닉에서 선남선녀 주인공만큼 주의를 끌었던 것은 침몰 순간까지 연주를 끝내지 않았던 악사들습이었다. 전쟁 등 비극의 현장에서도 예술혼은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故박태준 선생(사진) 역시 제주 근대사의 가장 큰 상처인 4·3사건에 휘말리며 붓을 바꿔잡았지만 예술을 향한 정열은 변함없었다.

"1948년 4월1일 그의 첫 서양화 개인전이 열렸어요.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4·3사건이 터지면서 전시회를 중단해야 했지요. 이후 그는 서양화 대신 서예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인 임방옥 여사 인터뷰 중)

서예가로 더 잘 알려진 故 박태준 선생. 그는 1926년 제주시 용담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정(海丁·海汀), 일서(一西), 우하(又荷), 수석헌 주인(守石軒 主人) 등이다.

 

   
 
 

'淸愼勤'

 
 

해방 후 일본 오사카시립미술학교 양화부(3년 과정)를 졸업하고 제주 오현고 교사와 동덕여대 강사를 역임했다.

23세였던 1948년 4월 제주북교에서 서양화 30여점으로 첫 개인전을 여는 등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그였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주의 질곡한 역사중 하나로 기억되는 4·3사건이 터지면서 전시는 3일만에 중단된다. 그리고 이후 박태준은 서예가로 방향을 돌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대적으로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아 그림을 그리는 것 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일상생활에서 효용도가 높은 서예가 가장으로의 위치를 지키는데도 유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태준은 서예가로서 국전을 통해 사회적인 명성을 쌓아갔다. 끊임없이 서법의 각 체를 두루 연마, 독보적이라 할 만큼 행·초서에서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글자의 자획 변화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생동감 있고 자유로우며, 회화성이 강하고 공간구성에서 현대적 감각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5회·특선 3회의 경력을 남겼다.

회화작품으로는 현재 소품이 전해진다. 고향 학교를 그린 유화, 수채화로 그린 관덕정, 콘테로 그린 초상화, 펜화 삽화, 작가노트 등은 다른 화가로 그가 지녔던 미학적 사고들로 '서예가 박태준'과는 다른 매력이 엿보인다.

특히 그의 소묘는 강한 필선이 특징이다. 삽화를 그리기 위해 전통인물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포즈와 복식을 연구하는 등 학구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다양한 포즈의 누드 연습, 현대미술 이론, 미술사에 대한 꼼꼼한 정리, 자신의 미학적 견해를 드러내고자 시도했던 습작 노트에는 채 꽃피우기 전에 접어야 했던 아쉬움이 빼곡하다.

   
 
  '학교풍경' (1950년작, 개인소장)  
 


   
 
  박태준이 그린 계몽 삽화.  
 

   
 
  박태준이 그린 만평.  
 


하지만 서예가 박태준의 길은 다르다.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히며 서울과 제주에서 상균회와 정연회를 조직, 후학양성에 힘 쏟다 지난 2001년 타계했다. 일생 다섯 번의 서예 개인전을 열었다.    

            미술평론가 김유정
           정리 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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