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영선 작품사진 강요배 제공

 1948년 제주. 
 고사리가 돋아나고 복수초가 자라고 생명이 섬에 윤기를 더해가던 봄. 이 땅에서 2만~3만여 사람들의 생명이 꺼져 나갔다.
 누구의 말처럼 그 중 얼마는 '빨갱이'였을 테고 또 그 중 얼마는 정말 빨갱이가 되려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유채꽃 위에 푹푹 쓰러져간 이들의 대부분은 '그저 그 때를 살아 가던' 사람들. 
 그 날의 피비린내는 바다의 짠 내에 묻히고 피로 물들었던 섬은 다시 노랗게 봄을 맞지만, 지금도 이 땅에는 그 때의 비극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4·3 발발 61년.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꺼내어 기억하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이기보다 차라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안위와 미래 세대들에게 온전한 땅을 물려주기 위한 자구책일지 모른다.
<문정임 기자>

   
 
  강요배 작 '한라'  
 

강요배 작 '산꽃'

 "4·3 광기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순이삼촌'. 제주에는 이러한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순이 삼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그 때의 학살이 국가권력의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기까지 55년…허나 진실 캐기 작업은 아직도 요원"

 "누군가 말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

 

 # 진실을 찾아서

다시 사월이다. 암청색 한라산과 그것이 거느린 작은 능선인 오름의 무리들이 오늘따라 더 사무치게 꿈틀거리는구나. 제주를 한번 찾은 사람들은 이 땅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한다고 말하지.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광 속에 사는 이 땅의 사람들은 정말 행복하겠다고 말하지. 정말 그럴까. 제주의 사월은 화사한 유채꽃으로 온 섬에 피어나지만 그 유채꽃은 비린 아픔이다.

네가 물었구나. 그런데 왜 제주도는 사월이 슬픈 땅이냐고. 네 물음에 짧은 대답으로는 명쾌하게 충족시키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안다.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그 서러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들려줄 수 있을까. (중략)

   
 
  강요배 작 '마파람'  
 


혹시「순이삼촌」을 알고 있는 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순이삼촌」에 나오는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다. 비록 소설의 이름을 빌렸지만,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한반도의 남녘 섬, 제주도의 이야기란다. 왜 '떼죽음'부터 말해야 하는지, 학살부터 말해도 될런지 나 또한 막막하구나.

그러나 확실히 말하자.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제로 치닫던 시기에 제주 섬엔 '붉은 섬'이란 딱지가 붙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았기에 제주도가 '빨갱이 섬'으로 몰려야 했을까.

그 이유를 대라면 섬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외세로부터 인간의 조건을 억압당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분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유를 대라면 하나 된 조국을 간절히 열망하며 강하게 저항했던 '죄'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대학살의 광풍이 섬을 휘몰아쳤다.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거기에 인간의 얼굴은 없었다. 더욱이 그 학살의 배경은 국가공권력이었다.

고립무원, 함부로 찾아오지도 쉽게 찾아올 수 도 없었던 섬. 철저히 격리시켜도 되었던 화산섬 제주도. 미군정이 지배하던 해방 후부터 이어진 1940년대 말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목숨 잃은 사람만 2만5000~3만여명, 제주사람 아홉 명 중 한 명이 죽어갔다.

   
 
  강요배 작 '동백꽃 지다'  
 

   
 
  강요배 작 '젖먹이'  
 

한반도 비극인 6·25전쟁에 버금가는 아픔이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이 이야기는 그 날 이후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침묵하라" 아무도 그 때 그 일을 소리 내어서는 안 되었다. 함부로 그 이야기를 벙긋했다간 국가공권력의 이름아래 온갖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로부터 30년 후, 기어이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지. 바로 소설 「순이삼촌」, '순이 삼촌'이 누구냐고? 4·3광기의 현장이었던 북촌리 옴팡밭, 그 학살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아 할머니가 된 사람, 소설 「순이삼촌」의 주인공이지. 제주에선 촌수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을 '삼촌'이라 부른다. 그 '순이삼촌'은 그 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칠 것 같은 악몽과 환청에 시달리다가 죽게 되지.

제주도에는 이러한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순이 삼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마을마다, 집집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란다. (중략)

 # 슬픔과 찬란함의 두 얼굴, 제주도

마침내 그 때의 학살이 국가권력의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대통령의 이름으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하기까지 5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허나 그것에 대한 진실 캐기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물론 혼란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토록 서늘하도록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제주 섬, 곳곳마다 학살의 상처가 없는 곳 드물다는 것이. 너무나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학살의 광풍이 제주 섬을 휩쓸고 갔고, 그 진실이 반세기 동안이나 묻혔다는 것이.

   
 
  강요배 작 '꽃비'  
 

제주를 찾는 많은 학생들이 "4·3이 뭐예요?" 라고 묻는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이 역사의 이름이 낯설기만 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비극의 상징 4·3을 캄캄한 동굴에 너무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탓이다. (중략)

누군가 말했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라고. 제주도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땅, 결코 묻어 버릴 수 없는 기억의 땅이다. 뼛골마저 사그라지던 굶주림 속에서도 오로지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된다)며 살아온 사람들의 땅이다.

단지 농사지으며 살아오던 사람들, 단지 젊다는 것이 죄가 되었던 사람들, 눈물마저 죄가 되었던 사람들을 어찌 잊겠느냐. 시대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들을 어찌 잊겠느냐. 이것이 산 자들인 우리가 너무나 억울하게 죽어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느냐. (중략)                                               글=허영선의 「제주4·3」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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