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61주년을 만난다
31일 4·3연구소 증언본풀이마당 열어
제도화 속 그늘에 갇힌 희생자 이야기

   
 
  ㈔제주4·3연구소가 주최하는 여덟번째 4·3증언본풀이가 31일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열렸다.   
 

 

"왜 하필 제주도에 이런 일 생겨 내 인생 엉망 됐는지 몰라. 사람이 무섭고 세상이 원망스러워. 사난 살아졌주, 지금 생각허믄…"

4·3 61주기를 3일 앞둔 31일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제주4·3연구소가 주최하는 여덟번째 4·3증언본풀이가 열렸다. 

 '그늘 속의 4·3-死·삶의 기억'을 주제로 열린 이날 증언본풀이 마당에는 4·3으로 평생 고통속에 살아온 강양자 양일화 송옥춘 김명원씨 등 희생자 4명이 그날을 증언했다.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해방 후 제주에 와 4·3을 겪게 된 강양자씨(67)는 당시 며칠째 소식이 없던 할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 돌부리에 척추를 다치면서 이후 등이 굽은 채 살아왔다. 강씨는 오돌오돌 떨리는 목소리로 "그 때 이후 여자로서의 삶도 사람으로서의 삶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다"며 "남은 삶의 단 한가지 소원은 하루라도 편히 자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무릎과 척추가 시린 탓에 밤마다 왼쪽 오른쪽 뒤척이기를 61년째. 하지만 호적에 기재된 출생연도가 잘못됐다는 이유 때문에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21세였던 송옥춘씨(83)는 4·3 혼란속에서 경찰에 의해 아이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송씨 집을 찾은 경찰이 젖을 먹던 아이의 머리를 총부리로 강타한 것. 송씨는 "그때부터 아기가 울지도 않고…내가 너무 어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다"고 울먹였다. 게다가 송씨는 고문으로 무릎뼈가 두 개나 골절된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그녀 또한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명원씨(76) 역시 4·3희생자이면서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김씨는 의귀교 4학년이던 때 4·3이 발발, 느닷없이 경찰에 끌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살아났다. 그러나 이미 4·3의 소용돌이 속에 부모님이 학살되고 갓난쟁이 여동생은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숨어살다보니 겨울엔 식량도 없고…어느 밤 아버지가 감자라도 구하겠다고 마을로 내려갔는데 의귀리에 주둔했던 토벌대가 눈 발자욱을 보고 따라온 거야. 아버지가 소에 고구마 싣고 온 것을 내리고 굴안으로 들어와 우리한테 주는 순간 '탕'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어. 마치 콩 볶는 듯한 소리가" 김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을 어렵사리 떠올리며 말을 잇는 중간중간 눈물을 훔쳤다.

증언현장에는 이외에도 개성 인천 전라도 거제도 등 전국 각 지 형무소에서 수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양일화씨(80)가 동석, 그 날의 아픔을 함께 풀어냈다.

증언자들은 4·3을 온몸으로 겪고 지난 61년간 고통의 나날을 살아온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000년이후 4·3특별법 제정, 4·3 진상보고서 발간 등 4·3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 제도화의 국면을 맞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볕'이 만든 그늘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사진·글=문정임 기자 mungdang@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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