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23. 김인지

   
 
  김인지 모습  
 
 # 제주미술의 선구자

 김인지(金仁志, 1907~1967)는 서귀포시 예래동에서 태어났다. 대정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제주농업학교 3년을 졸업하고, 1927년 전라남도 도립사범학교 강습과에서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28년 21살에 광주사범을 졸업한 김인지의 첫 부임지는 중문공립국민학교(현 중문초등학교)였다. 젊었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김인지는 일본인 화가와 교류했고, 1934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광회도화강습회'에서 1개월간 수채화를 배웠다. 서귀국민학교, 서귀북국민학교, 제주북국민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43년 일본인 교장의 후임으로 한국인 김인지가 중문공립국민학교 교장이 됐다. 당시 한 제자는 김인지를 "금테안경이 유난히 돋보이고 검은 가죽 장화까지 반짝거리고…목청은 카랑카랑했다…금언(金言)으로는 '젊은이여 대망을 가져라'였다"고 기억했다. 김인지의 손자인 김석준 제주대학교 교수는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가 그림 지도해준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내가(김석준 교수) 사과를 빨간색으로 칠하니까 조부께서 사과에 노란색을 칠한 다음 여러 가지 색으로 사과를 완성하여 깜짝 놀랐다. 그때 나는 색칠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후 난 사과를 잘 그렸다" 김인지는 빛에 따라 생동감 있게 보이는 색채의 원리를 일찍이 손자에게 가르친 것이다.

 해방 후 영어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통역도 했다. 1946년부터 2년간 제주도 총무국 학무과장을 역임했다. 1948년 2월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서 제주의 풍물을 그린 30점으로 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10여년간 KBS 제주도방송국장을 지냈다. 1955년 제주도미술협회 초대회장, 1956년 문총제주도지부장을 역임한 후 문화예술계에서 교육계로 돌아왔다. 1961년 4월 북제주교육구 제3대 교육감에 피선되었으나 5·16군사 쿠데타로 말미암아 교육자치제가 강제 폐지됨에 따라 1개월만에 교육감직을 사퇴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제주시장을 역임한 후 몇몇 공직을 수행하다 1967년 3월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조선미술전람회(鮮展)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미술전이었다. 1921년에 구성된 선전의 첫 전시회가 1922년에 열렸고, 1945년 해방이 되면서 23회전(1944)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22년 1월 21일자로 공표된 총독부 고시 제3호에 따른 '미술전람회'의 규정에 따르면 그 목적이 '조선에 있는 미술의 발달을 비보(裨補)하기 위해서 매년 1회 전람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출품자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과 일본인 미술가를 통틀어 비경쟁 부문(無鑑査)과 경쟁부문(受鑑査)으로 나누었고, 출품할 수 없는 경우는 출품작이 제작 후 5년이 지난 것과 해당 전람회에 전시했던 것, 치안풍교(治安風敎)에 유해하다고 인정되는 것'이었다.

 제1회전의 총 출품작은 403점이었고 입선작은 215점이었다. 입선자는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이 매우 적었고 출품한 조선인들은 거의 입선의 반열에 들었다. 서양화 심사위원으로는 일본 양화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작(子爵)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가 내정되었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고(事故)로 심사기일까지 경성에 도착할 수 없게 되자 제국미술원 회원(帝國美術院會員)이며 미술학교 교수(美術學校敎授)인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郞助)가 심사위원으로 임명됐다.

 # 조선미술전람회에 3번 입선한 김인지    

   
 
  선전 14회 입선작 '애(涯)'  
 
 김인지는 제14회 선전에 전라남도 제주도 출신으로 유일하게 서양화 부문에 입선함으로써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김인지가 제14회 선전에 입선하기 전까지, 전라남도 출신이 선전(鮮展) 서양화부문에 입선한 경우는 제9회전(1930)에 '풍경', '나체습작' 2점을 출품하고 제10회전에 '나부(裸婦)'를 출품한 오점수(吳占壽)와 '송정리(松汀里)'를 출품한 장윤천(張允千)이 있었다.   

 김인지가 첫 입선한 제14회(1935) 선전의 총 출품작 수는 1190점에 이르렀고 입선작 수는 296점이었다. 조선 사람이 입선한 작품 수는 110점이었다. 김인지가 출품한 분야인 제2부 서양화에서 조선사람 입선작은 무감사 4점, 수감사 52점이었다.

 이때 김인지가 출품하여 입선한 것은 '애(涯)'라는 작품이다. '애(涯)'는 서귀포 천지연 폭포로 가는 남성마을 쪽 암벽을 그린 그림인데 웅장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천지연 폭포 물가에서 빨래하는 여성을 그린 것이다.

 제14회 선전은 1935년 5월 18일~6월 8일 경복궁에서 개최됐다. 다른 해에 비해 서양화 출품은 줄어들고 타 부문은 늘어났다. 서양화 부문의 심사위원 고스기 호안(小杉放菴)은 "조선전람회는 중앙(일본 동경)의 조류를 추종하는 경향이 많다", "조선인의 작품으로 조선이 아니면 못하는 작품이 있는데 나에게 가장 유쾌한 기분을 주었고 이것이 개성이라 할 것이다", "우량한 작품으로 조선인의 작품이 많았다", "기량만 믿고서 단시일에 함부로 그린 것은 예술가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반감(反感)을 갖게 한다", "조선전람회의 기초가 박약한 것은 기초 교육을 받을 학교가 없는 까닭인가 한다"고 평했다.

   
 
  선전 15회 입선작 '서귀항'  
 
 김인지의 두 번째 선전 입선은 이듬해인 1936년 15회전이었다. 그는 '서귀항'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수록된 '서귀항'을 보면 화면 상단으로 새섬이 보이고 왼쪽에 그려진 언덕에는 기와집이 있다. 그 언덕 아래 포구에서 배를 기다리는 여인들과 입항하는 작은 배들이 그려졌다. 화면 하단에는 초가집이 아닌 신식집의 지붕이 무게 중심을 잡고 있다. 화면은 꽉 차게 느껴지지만 분위기는 평온하게 느껴진다.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 평은 조선일보 1936년 5월 20~28일자 총 7회에 걸쳐 안석주(安碩柱)의 평론을 게재했다. 이때 안석주는 "김인지 씨의 '서귀항'은 평범하다. 사진기 렌즈 외에 다른 관조가 없을까. 여기서 완성되면 새것을 보기가 드물 것이다"라고 하여, 김인지에게 대상을 보는 방법의 다양성과 안일한 자세를 버릴 것을 주문했다. 제15회 선전 출품자는 609명, 입선자는 261명이었다. 15회 선전과 관련해서 흥미 있는 것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 4명 포함, 숙명고보출신 여성 7명이 입선했다. 평안남도 출신만 20명이 입선하는 등 지역 편중 현상도 있었다. 10세 소년이 서양화 부문에 입선해 놀라게 했고, 조선인 특선자가 일본인과 똑같은 10명이어서 일본인과 동등하게 50%를 차지하기도 한 해였다.

   
 
  선전 17회 입선작 '해녀'  
 
 김인지의 세 번째 선전 입선은 다시 2년 뒤인 1938년 제17회 때였다. 출품작은 '해녀'였다. '해녀'는 가까이 새섬이 보이고 해안가에서 물질을 마치고 온 해녀들이 몸을 말리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큰 터치로 그려진 해녀의 인물들은 디테일하기 보다는 인체를 덩어리로 표현하여 단순하면서도 건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미술평론가이자 조각가였던 김복진(金復鎭)은 이 작품을 보고 "김인지씨 '해녀'는 다시 가감(加減)을 허락하지 않을만치 통합(統合)된 가작(佳作)이라고 생각된다"고 극찬했고, 서양화가 김인승은 "김인지씨 '해녀'는 앞으로 대작을 보여주기 부탁한다"라고 기대를 걸었다. 제17회전의 출품작 수는 총 1134점이었고, 입선작 수는 263점이었다. 이 가운데 서양화의 출품작 수는 794점에 입선작은 137점이었다. 이 전시의 관람객 수는 3만2551명으로 16회전 관람객 2만6740명보다 약 5000명 이상 늘어났다. 

 김인지는 제주도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명성과 함께 제주도 사회의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전개했다. 화가이자 교육자로서, 또한 방송인이자 행정가로서 기여한 공이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중앙화단에서 인정받아 유망한 화가로서 진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가지 못한 것은 무슨 때문일까. 각계에서 필요로 하는 개화한 선각자였지만,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한 김인지를 생각하면 우리 미술계의 큰 손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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