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59. 박충검

민족 미학에 대한 모색, 서구 미학의 수용적 폐해에 대한 반성적 결과 
전통산수에서 보여준 필법의 한계는 현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생전의 박충검  
 
# 제주에서 출생한 인연

그림 그리는 일에 만족하는 이가 바로 화가이다. 화가에게 그림 그리는 순간은 어느 때보다도 최고로 행복을 누리는 시간일 것이다. 따라서 화가는 자기의 그림을 자신의 분신(分身)으로 생각하여, 어떤 대상보다도 더욱 애착(愛着)을 갖게 된다.

작품은 한 화가의 실존적 의식과 무의식, 존재의 사회·역사적인 경험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은 화가의 기억, 삶의 순환적 체험, 고독, 상상력, 열망 등으로 뭉쳐진 에너지 덩어리이다. 말하자면 작품은 자신의 삶에서 독립될 수 없는 인식적인 형상물인 것이다.

작고화가 박충검(1946~2005)은 1946년 제주시 김녕에서 태어났다. 호는 청호(靑湖). 본적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박충검 연보(年譜)에 의하면, 1960년 부산 영선초등학교, 부산 대신중학교, 경남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1968년에 중앙대학교(서라벌예대) 3년을 수료하였다. 그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였다. 1975년 동아대학교 문리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7년 계명대학교 대학원을 마쳤다.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 전임강사를 역임하였고, 1983년 이후 경성대학교 미술학과,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 강사를 거쳐 1991년 신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내외 개인전 11회, 국내 단체전 및 초대전 250여회 등 매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부산미협), 부일미술대전 운영위원(부산일보사), 부산미술대전 한국화분과 심사위원장(부산미협), 제주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2005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김유정, 2008).

한국화가 박충검은 제주도에서 출생했으나 어릴 적에 부산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다. 하지만 그는 제주도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에 1981년 제주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제주도미술대전 심사위원으로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2008년에 제주 작고작가미술제 '바람의 노래, 다시 피는 화혼(畵魂)'에 그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현재 그의 작품이 소장된 곳은 부산광역시청, 제주특별자치도립미술관, 제주시 남녕고등학교 등이다.

   
 
  하도(河圖) -오름 가는 길, 120.5x120.5㎝. 닥+혼합재료, 1999.  
 
# 박충검의 한국미 모색

박충검이 개인전을 처음 연 곳은 1977년 부산 현대화랑(6. 16 ~ 6. 22)이었고, 대구백화점의 A화랑(6. 29 ~ 7. 4)에서 연이어 전시회를 열었다. 이 개인전에는 <까치 호랑이>, <십장생도>, <군마(軍馬)>, <역사(歷史)의 장(章)>, <고(古)>, <한일(閑日)>, <춘광(春光)>, <청춘찬미(靑春讚美)> 등 모두 28점이 출품되었다. 제목을 보면 그의 관심 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민화적인 소재, 예를 들어 호랑이, 까치, 십장생, 말, 고양이, 석가여래와 보살, 피리 부는 소녀와 새, 남매, 말과 누드 등을 통해 목가적이고 향토적인 자연을 그리고 있다.

1970년대 후반은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민족적인 미학에 대한 모색기, 혹은 그간 서구 미학의 수용적 폐해에 대한 반성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족 미학에 대한 접근 방법이 두 갈래로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탈, 장승, 탱화, 단청, 십장생 등 기존 전통에서 우리의 미학을 찾고자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살아 숨쉬는 현실에서 생동하는 우리의 민중성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었다. 박충검은 전자에 해당하는데, 서구 미학에 가려 소홀했던 우리 것들을 재생하여, 한국적인 미를 찾는다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후자는 민족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서구미학을 외세주의의 폐해로 보고, 전통성과 시대성을 결합, 현실의 건강한 민중들의 삶을 통해 민족적인 가치를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첫 개인전 평문을 보면 박충검 회화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청호(靑湖)의 그림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를 그리지 않는 그의 그림 속에 바다가 투영하는 여러가지 환상적 설화들이 수놓아 있다. 그것은 내륙적인 건조한 공기 속에서는 볼 수가 없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여러 가지 환각의 영상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해풍의 습기와 기압과 간만조(干滿潮)의 교체와, 이러한 자연의 움직임 속에서 애니미즘적인 환각과 설화가 태어난다". 이어 평자는 그의 그림에 대해 "민화풍의 작품들은 꾸며 낸 것 같은 거짓이 없고, 우리 민족의 집단생리에서 비롯되는 토속성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독특한 화면 분위기에 의해서 우리들을 잃어버린 향수에로 이끌어 간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박충검은 현대 문명에 찌들어가는 인간적 본성과 사라져 가는 자연적인 생태를 아쉬워하며 전원적인 삶, 목가적인 생활의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다. 1981년 제주도 전시공간(1.10~1.15)의 초대전에서는 기존 작품의 경향을 이어가면서도 점차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데, 탈이 등장하는가 하면, 수목의 병렬적 배치, 기와집의 단조로운 구성 등 형식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하도(河圖), 72.7x60.6㎝. 닥+혼합재료.   
 
# 박충검의 작품세계

박충검은 제3회 개인전에서 두 가지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먼저 탈춤을 추는 연행자를 이용한 여백의 활용이다. <회고(回顧)>라는 제목의 이 시리즈는 탈춤을 소재로 한 공간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경기 산대놀이에 등장하는 각시탈과 비슷한 양주소무 탈, 송파노장 탈과 비슷한 탈을 쓴 모습의 두 연행자가 작은 공간의 틈새로 얼굴을 보인다. 중앙에서 위쪽으로 얼굴을 그려 넣어 무게가 쏠려있고, 다시 중앙에서 아래쪽으로는 교차되는 선을 그렸지만 충분한 여백이 남겨진다. 갈옷의 색상과도 같은 황토빛 바탕색은 한국의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이다.

또 한 가지 변화는 사실성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암벽, 소나무, 소는 수묵과 청색 계열로 그리고, 아이들은 흰옷에 갈색의 피부로 처리하고 있어 명시성이 뛰어나다. 화면의 배경은 주로 발묵(發墨)을 이용하여 부드러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데, 중심 소재가 되는 나무들은 강하고 빠른 필선으로 처리하여 화면에 힘을 싣고 있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993년 제4회 개인전은 작품의 새로운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채색의 등장, 반추상적인 도상들, 2~3개의 화면분할, 뿌리기 등을 시도하고 있는데, 화면의 구성은 매우 구성주의적이고 여백 활용이 더 적극적이다. 박충검의 미의식의 변화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이어 1998년에 이르면 더욱 단순한 산수도(山水圖), 혹은 명당도(明堂圖), 목판 지리도(地理圖)와 같은 단조로운 형식이 등장한다. 이 때의 작품을 미술평론가 김해성은 "박충검의 작품은 크게 보면 서정성과 장식성, 공간성과 평면성 등 대조적이기도 한 회화적 요소를 묵필과 채색필의 묘한 조화에서 찾고자 한 스스로가 착안한 혼합적 표현 방식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2000년 예술의 전당에서 보여준 <하도(河圖)-오름 가는 길>과 <하도(河圖)-하늬 바람> 시리즈는 박충검의 공간 해석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 사각형의 화면은 땅을 상징하고 다시 그 속에 그려진 원형은 구름, 일월을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즉, 천지(天地) 운행, 자연의 순환, 시간의 변화를 리듬감 있게 표현하여 장식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기 이후의 작품을 보면 박충검의 고정적인 도상, 즉 작품 스타일이 2000년을 기점으로 안정적으로 구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장식성이 더욱 강화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를 보인다. 양각의 선묘로 된 산세(山勢) 표현, 종이배, 화려한 채색의 물고기, 여러 가지 화려한 꽃들, 색동으로 칠해진 문양들이 화면 곳곳에 배치된다. 이것들은 갈색이나 백색, 검은 색의 바탕위에 그려진 오방색의 기하학적 산, 선묘의 물고기, 전통 창문, 소나무 등과 서로 어울려 하나의 통일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박충검은 추상과 구상의 배치를 통해 한국화의 현대성을 찾기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하였다. 단지 재료로만 구분되거나 소재에 제한을 받는 한국화의 보수성을 혁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표현의 제약은 한국화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관념산수든 실경산수든 한국의 자연관의 산물로서 전통산수에서 보여준 필법이나 묘사법, 소재의 제약이라는 한계는 현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예술의 흥기와 성쇠는 바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당대에 맞는 철학, 생활 패턴이 예술의 변화를 요구한다. 박충검은 산업사회를 겪으면서 전통 산수화는 현실에서 이상향의 상상적 관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이제 한국화는 보다 더 넓은 차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지점에 전통을 포기하면서도 전통을 강화시키는 박충검의 역설적인 작품세계가 존재한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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