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 4·3취재반 출범④

   
 
  1989년 12월 31일 국회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한 국회의원이 질책하고 있다. 광주청문회는 4·3 체험자들의 입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증언 회피" "사실 왜곡" 사례들도 적잖아
 증언 꺼리던 주민들 '광주청문회'후 변화


4·3취재반 출범④

4·3처럼 오랫동안 은폐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체험자들의 구술 증언이다. 4·3취재반은 이 점을 매우 중시했다. 문헌자료가 줄 수 없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제주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본연의 취재활동(각자 출입처가 있었음)을 하고, 밤에는 마을을 누비며 체험자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증언을 들을 마을이 대부분 시골인지라 웬만하면 80대 노인도 밭일을 나가기 때문에 밤 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반은 조천읍 선흘리를 시작으로 마을 취재에 나섰다. 그러나 취재반에게 곧이어 두 가지 어려움이 봉착했다. 그 하나는 증언자들이 피해의식 때문에 증언 자체를 회피하는 경우였다. 할아버지가 겨우 맘을 잡고 입을 떼려고 하면 "이 하르방, 또 잡혀가려고!"하며 할머니가 가로 막았다.

다른 하나는 어렵게 채록한 증언 내용을 검토하다보면, 같은 사건을 놓고도 구술자마다 다르게 증언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기억이 희미하거나 사건을 잘못 파악해서 빚어진 일도 있었지만, 일부러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왜곡시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즉 앞의 사례는 잘못된 정보를 '입력'시킨 컴퓨터가 수십 년 동안 수정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된 내용을 '출력'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달랐다. 오랫동안 반복 학습된 반공교육 탓인지 스스로 선악을 구분하고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으로 채색한 후 증언을 한다는 점이다.

요즘은 '증언사' 또는 '구술사'라는 학문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집합기억'이라 한다. 즉 "개인의 회상들이 존재하지만, 개인들은 사회적 집단의 한 성원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술사는 과거가 현재에 어떻게 작동하고, 현재가 과거의 재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그 역학적 관계까지 분석 규명해야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취재반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다단계 취재방식을 택했다. 마을 취재는 팀워크를 바탕으로 ①사전 준비 ②취재반 토론 ③1차 취재 ④취재내용 분석 및 상이점 검토 ⑤2차 취재 ⑥종합분석 ⑦연재 인용시 재확인이란 7단계를 거치며 검증에 검증을 계속했다.

처음 취재 과정에서는 구술자의 입을 열 수 있게 설득하는 것이었다. 참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나이가 몇 살인가. 자네들은 당시를 몰라."로 시작된 구술은 일제시대를 돌고 돌아 해방공간에 이른다. 결국 몇 시간을 들어도 4·3에 관해서는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정도 노하우가 쌓이자 1차 취재 때는 주로 듣고, 2차 취재 때는 준비한 의문사항을 질문하고 답변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고전 속에 뜻밖에 체험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88년 11월부터 시작된 국회의 '광주 청문회'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광주 학살사건의 진상조사가 국회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전국에 생중계된 청문회는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언대에 서게 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광주 청문회 이후 4·3 체험자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청문회에서 총에 대검을 꽂았느냐 안 꽂았느냐가 쟁점이 되던데, 제주사태 땐 그건 문제도 아니었다."고 분을 삼키며 4·3의 참혹상을 이야기했다.

덩달아 그동안 만류하던 할머니들도 커피 잔을 들고 와 취재반 옆에 조용히 앉더니 곧 입을 열기 시작했다.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의 제사 날짜를 일일이 구술하는 등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그때 '4·3같은 과거사는 혼자 따로 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연동(連動)'의 중요성을 체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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