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 김석범의 고향 방문

   
 
  1988년 11월 제주신문사를 방문한 김석범 선생(가운데)을 맞은 송상일 편집국장(오른쪽)과 필자. 그는 4·3 직후 일본으로 밀항해온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4·3 소설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4·3직후 밀항온 동포들 얘기에 큰 충격"
   일본 사회에 4·3 비극 알리는 선구자 역

김석범의 고향 방문

1988년 11월 14일로 기억된다. 편집국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나 김석범이요, 방금 전에 제주에 도착했어요." 말로만 들었던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과의 첫 상봉은 이렇게 시작됐다. 짙은 눈썹, 예사롭지 않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창작의 뿌리를 제주4·3에 두고서도 43년 동안 제주 땅을 밟지 못하던 김선생의 귀향은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첫째는 국적 문제이다. 그는 무국적을 고수했다. 외국인 등록 국적 란에 '조선'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것은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이전의 이름인 동시에 미래에 있을 통일 조국의 이름"이라고 고집했다. 그 때문에 당국은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그때 방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의 초청으로 어렵게 비자가 발급된 것이다.

두 번째 화제는 배를 타고 온 이유였다. 그는 4·3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 있을 공항에 비행기로 착륙하고 싶지 않고, 40여년 동안 고대하던 고향 방문을 '비행기 타고 쌩하게 날아올 수 없다.'면서 배편을 고집했다. 한라산을 멀리서 찬찬히 보면서, 갖가지 상념을 하며 제주 땅을 밟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서울과 광주를 거쳐 완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조용히 제주에 왔다. 

이런 일화도 있다. 그는 아사히신문사가 우수한 일본어 산문작품에 수여하는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郎賞)을 1984년에 받았다. 그 후 고향 방문을 추진했으나 국적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가고픈 고향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사히신문사 측에서 특별제안을 했다. 취재용 세스나 경비행기를 제주도 인근 공해 하늘에 띄워 한라산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탔는데, 구름에 싸인 희미한 한라산만 멀리서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김석범 선생이 나와의 인터뷰 도중 눈물을 글썽이며 들려준 것이다.

그는 1957년 일본 문예지에 단편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한다. 「까마귀의 죽음」은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976년부터 대작 「화산도」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97년 전7권이 간행될 때까지 20여년이 걸렸다. 이 작품은 200자 원고지 2만 2000장 분량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만 100여명에 이른다. 「화산도」 일부는 1988년 실천문학사에 의해 한글로 번역되어 5권의 책으로 발간됐다.

김석범 선생은 1925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삼양이다. 제주에는 유년시절과 1945년 청년시절에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고향은 언제나 제주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는 아사히신문 이외에도 마이니치신문사의 예술상을 수상할 정도로 일본 문학계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작가다. 국내외에서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여러 편의 논문도 발표됐다.

"왜 4·3에 매달렸는가?"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4·3 직후 일본으로 밀항해온 동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내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재일인의 입장에 처한 부채감과 애향의 마음이 고향을 이야기하게끔 한 것 같다"

그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채록하며 제주도 지도를 일일이 그렸다. 그럼에도 4·3 당시 제주사람들의 생각과 풍경, 풍습, 거리,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감각과 감정까지 몰입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의 관심사는 해방 공간의 한반도 모순이 제주에서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 신탁통치 문제 등도 재해석하고 재연구돼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그때의 고향 방문 소감을 「고국행」이란 책으로 발간했다. 그는 재일동포사회에 제주4·3 진실찾기 혼을 불어 넣었으며, 일본 지식인사회에도 4·3을 알리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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