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5. 1인극 배우 심우성

1963년 남사당을 정식으로 극단에 등록, '사물놀이' 이름 지어
현장에서만 숨을 쉬는 것이 1인극의 생명력이자 미학적 특질

   
 
  심우성이 만든 종이 인형들  
 
# 사람은 시대의 증인

인생이 경험을 쌓아가며 흘러가는 행로라고 한다면,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겪는 일이 개인사이지만, 그 개인사는 시대사의 큰 물줄기가 되기도 한다. 역사라는 시간의 가치는 결국 수많은 개인들의 관계가 얽힌 삶의 모습을 담아내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사람마다 겪는 경험과 그 가치가 다를지라도 어떤 이는 그것을 훌륭한 유산(遺産)으로 만들어 간다. 하지만 누구나 문화적 자산이 되는 삶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문화를 자산으로 만드는 사람은 어쩌면 선택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격동기에 살아남은 행운만으로도 소중하지만, 전통문화의 무거운 짐을 지고 격동기를 헤쳐 나온 것 또한 필부(匹夫)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동네, 동료, 집단, 지역, 민족적 생기가 작용한다. 그것이 기록되고 정리될수록 범부(凡夫)를 넘어 바야흐로 역사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역사적 인물이 될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시대를 어떻게 만나고 자신의 역량이 얼마만큼 당대에 발휘되느냐에 따라 그 가치 평가는 달라지게 된다.

   
 
  심우성 근영  
 
# 1인극 배우 심우성

언뜻 보면 해맑은 얼굴이기도 하지만 볼수록 얼굴에서 기가 발산되는 사람이 있다. 그가 1인극 배우이자 민속학자인 심우성(沈雨晟, 1934~  )이다. 심우성은 약 5년 전, 서울 삶을 정리하고 한라산 북쪽 제주시 용강동에 처소를 마련하여 제주의 자연을 벗 삼고 있다. 낮에는 관덕정 부근에 마련한 한국민속극연구소를 지키고 있다. 아버지 심이석은 탈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심우성의 남사당 스승은 최성구. 1인극의 스승은 신불출(申不出)이다. 서울태생인 신불출은 해방 후까지 작품 활동을 하다 1956년 타계하였다. 스승의 작품으로는 <한강에서 산다>, <인왕산 호랑이>등이 있다. 

심우성은 무언으로 1인극을 펼치지만 그 감동의 경중(輕重)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또한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번역가, 학자이며 배우로서 다역(多役)을 거뜬히 소화해낸다. 그가 번역하고 지은 책만도 20여권이나 된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한양대 연극과, 서울예술학교 연예과에서 강의를 하였다.

심우성의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인생역정(歷程)은 기막힌 사연으로 가득한데 인생자체가 1인극 드라마와 다름없다. 심우성이 명륜동에 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휘문중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한 동창생이 심우성의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그를 따라 학교에 갔다. 학교에는 인민군이 학생들을 모으고 있었다. 심우성도 훈련을 받고 서대문에 있는 무악재 넘어 인민군훈련소에 잡혀가서 서울 수복이 되기 전까지 붙들려 있었다. 심우성은 전선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가 대전을 지나 다시 남쪽 지리산 가까운 곳으로 내려갔다. 전선이 인민군에게 불리해지자 그때 인민군 장교가 "동지들 숙식이 안 되니까 지리산으로 올라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심우성은 심한 배탈이 났고, 모두들 심우성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 도저히 산에 함께 가기 힘들다"고 하여 홀로 마을에 남겨졌다. 천만 다행이었다. 그 곳은 충북과 경상도의 경계에 있는 황간이라는 곳이었다. 인민군 옷차림이었던 심우성은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서울을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빈집에 들어가서 인민군 옷을 벗어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고향 공주로 발길을 돌렸다. 

고향 공주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피난 가고 없었고 가족처럼 지내던 정광진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정광진은 남사당패 꼭두쇠 출신이었다. 그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가 어렸을 적부터 공부하던 김재철의《조선연극사》를 읽었다. 책 앞부분에 탈, 인형이 나오자 정광진이 남사당에 대한 정보와 함께 공주에서 가까운 대전, 경기도 어딘가에 남사당출신 노인 몇 명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심우성은 열일곱 살이었다.

얼마 없어 국군이 들어오고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심우성은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향하였다. 반은 군인차를 얻어 타고, 반은 걸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 집은 엉망이 된 채 비어 있었다. 1남 4녀 중 장남이었던 심우성은 부모님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학교가 정상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심우성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즈음 경기도 가평에 있는 이모님댁으로 피난 갔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1살짜리 막내동생을 업고 돌아왔다. 심우성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이모님 댁에 두고 온 동생들을 데려왔다.

공부하는 것이 취미였던 심우성이었으나 공부의 취미도 없어지고 은근히 연극에 관심이 쏠렸다. 정광진으로부터 들은 남사당 놀이의 설명과 그 종목들이 지녔던 탁월한 예술성에 매료되어, 자신도 그런 놀이를 하는 훌륭한 광대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1953년에 정광진이 세상을 떠나자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를 그만두고 그가 일러준 남사당패를 찾아 다녔다. 상쇠의 최성구(崔聖九), 꼭두각시놀음의 남형우, 장구의 양도일(梁道一), 땅재주의 송순갑(宋淳甲) 등이 그때 만난 사람들이었다.

1959년 8월 심우성은 남산 광장에서 남사당 놀이판을 벌일 때까지 전국을 떠도는 뜬광대 노릇을 했음은 물론이다. 20년 가까이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던 여섯가지 남사당 놀이(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음)를 재현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어렵사리 아버지가 마련한 집을 팔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떠돌이 광대였던 심우성에게 큰 변화가 있었다. 1963년 심우성은 남사당을 정식으로 극단에 등록시켰다. 남사당은 중요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고, 심우성이 그 원고를 썼다. 월간지, 학술지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서 현장을 연구하는 '민속학자'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때 한 10년 발표한 글을 모아 《남사당패》,《민속극》,《민속놀이》등과 이 방면의 소견을 쓴 글들을 모아 《심우성평론집-민속문화와 민중의식》을 출판하면서 대학의 강좌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욕심보다는 광대가 되겠다는 잠재의식이 서서히 심우성의 내면을 깨우고 있었다.  

   
 
  <쌍두아> 포스터  
 
# 시대를 응시하는 예술가

심우성이 제일 처음 한 인형극은 <꼭두각시 놀음>이었다. <탈놀이>, <인형놀이>는 직접 공부를 해서 출연보다는 연출을 하였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처음 지은 것도 심우성이다. 당시 김용배(현재 故人),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등 4명이 찾아와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4명이 함께 한다하여 '사물놀이'라고 하였다. 1978년 첫 공연한 곳이 '공간사랑'이었다. '공간사랑'은 혜화국민학교 선배인 김수근이 세웠다. 사물놀이 첫 발표회 하던 날, 판소리 명창 김소희 여사가 쓴 '사물놀이'기를 우뚝 세웠다.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광대나 학자보다는 전통예능을 바탕으로 대사가 없는 1인극의 세계를 개척해보자는 마음으로 <쌍두아(雙頭兒)>를 만들어 공연하였다. 1인극 첫 작품인 <쌍두아>는 한 몸에 머리가 두 개로서, 남과 북으로 갈린 민족의 자화상이었다. 한때 의용군이자 제2국민병 양쪽을 경험했던 그의 인생사가 바로 쌍두아와 다름없었다. 그 밖의 1인극 작품으로는 <문>, <남도의 들노래>, <새야 새야>, <판문점>, <결혼굿>등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은 일본대사관 앞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하던 곳에서 공연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4·3고개를 넘어 간다>는 4·3의 비극을 담은 1인극으로,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일본의 '부크(PUK)인형극장'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하였다. 1978년 이후 여러 편의 1인극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200여회를 공연하였다.  

"오늘 심우성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날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화두를 찾는다. 평생 동안 심우성은 1인극만을 공연하였다. 그의 1인극에는 대사가 없다. 음악과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음향과 손수 만든 인형 등이 함께할 뿐이다.

심우성의 미학은 "1인극은 할 때, 그 마음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공연의 현장성, 시간예술로서 공연 당시의 감흥에 맡길 뿐이고, 그것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 되는 것이다. 현장을 떠나면 극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현장에서만 숨을 쉬는 게 그의 1인극의 생명력이자 미학적 특질이다. 세상이 바뀌면 그의 1인극도 바뀐다. 시대가 극을 만들고 극이 시대를 이야기 한다. 심우성은 시간의 한 가운데 있고 역사의 현장에 있다. 다시 무대의 현장을 떠나면 그의 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관객들은 가슴 속에 뭉클한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하나씩 품고 살아가게 된다. 아픔과 슬픔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이르지 못한 곳을 향하고, 다하지 못한 뜻을 모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심우성의 1인극의 힘인 것이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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