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0> 확산되는 4·3 진영

   
 
  1989년 5월 10일 4·3연구소 개소식에서 인사하고 있는 필자. 오른쪽에 현기영·오성찬 선생, 송상일 국장 등이, 필자 앞에 김종민 기자가 앉아 있다.  
 

제주MBC '현대사의 큰상처' 특집 방송
4·3연구소 출범으로 학술적 토대 마련

확산되는 4·3 진영
「4·3의 증언」 연재물이 첫 보도된 1989년 4월 3일 그날, 제주도에서 두 가지 의미 있는 일이 더 있었다. 그 하나는 제주시민회관에서 재야단체 주최로 4·3 추모제가 열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제주MBC가 4·3 특집기획물을 방영한 것이다.

처음 열린 4·3 추모제는 11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제주4·3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사월제 공준위)가 주최한 것이다. 행사는 4월 1일부터 3일간 추모굿, 슬라이드 상영, 시화전, 강연회, 진상규명 촉구대회, 토론회 등 다양하게 진행됐다. 놀이패 한라산은 마당굿 <한라산>을 공연했다.

그런데 공안당국의 훼방은 변함없이 진행됐다. 당초 강연은 현기영 소설가와 김명식 시인이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기영 소설가가 여러 날 마포경찰서에 유치되는 바람에 김명식 혼자 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4·3은 민중항쟁이다!"라고 열정적으로 외쳤다.

더 심각한 상황은 추모굿 주관자가 행방불명된 사건이었다. 처음 시도된 추모굿은 제주칠머리당굿 기능보유자로 유명한 안사인 심방이 진행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소식이 두절된 것이다. 뒤늦게 알려진 이야기는 당국에 의해 부산 모 호텔에 '연금 아닌 연금'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마당굿에서 '심방'역을 맡아온 정공철 제주문화운동협의회 대표가 대역을 맡았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굿을 진행했다. 4·3 유족만이 아니라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다. 그날 그는 뜻하지 않게 '심방'으로 전격 데뷔한 것이다.

제주MBC는 이날 '현대사의 큰 상처 제주4·3사건'이란 테마로 4·3 특집 기획물을 방영했다. 김건일 기자가 취재구성, 오석훈 기자가 영상취재를 맡은 이 기획물은 4·3을 처음으로 TV 화면에 올린 것이다. 그 배경에는 대학생 때 4·3 진실규명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른 이문교 보도국장의 역할이 컸다.

그해 5월 10일에는 제주4·3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 개소식은 제주시 용담동 쌀가게 2층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진행됐다. 4·3연구소는 1987년 서울에서 결성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팀과 1988년부터 제주도에서 은밀하게 4·3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채록을 벌이던 현지 팀과의 결합으로 태동됐다.

제사협은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 3일 서울에서 4·3 학술대회를 가진 이래,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제주도 현지에서 증언조사를 하는 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접목하게 된다.
제주 현지팀은 굿 연구를 하는 문무병을 중심으로 김창후·양성자·이석문·강은숙·김기삼·강태권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애월·조천읍 일대를 돌아다니며 4·3 증언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증언조사를 하면서도 4·3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어서 마을지 조사를 한다면서 서서히 4·3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4·3연구소는 초대 이사장에 정윤형(제사협 회장), 소장에 현기영(제사협 부회장), 사무국장에 문무병, 간사에 홍만기(제사협 파견) 체제로 닻을 올렸다. 개소식과 함께 그동안 제주 현지팀이 작업한 증언 자료집 「이제사 말햄수다」 제1권 출판기념 독후감 발표행사도 가졌다. 「이제사 말햄수다」 제2권은 그해 8월에 발간된다.

나는 이날 4·3연구소 개소식에 4·3취재반장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취재반의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4·3연구소의 출범은 자료 축적과 학술적 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뜻이 있다면서 그 출발을 축하했다.

제주신문의 4·3 연재와 4·3연구소의 공식 출범은 금기와 왜곡, 굴곡진 역사의 벽을 뚫고 4·3에 대한 공론의 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개인적 기억 속에 밀봉되었거나 억압되었던 4·3의 말문을 트게 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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