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1> 4·28평화협상 실상 ①

평화협상 참석자 중 유일 생존자 확인
단서는 "부산서 사업" 회고록 기록 뿐

4·28평화협상 실상 ①
   
 
  1948년 4월 22일 김익렬 연대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뿌린 전단 내용. 당시 신문에 나왔던 내용을 전단으로 만들어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여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서청) 단원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1948년 4월 5일 설치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도 경찰 조직이다.

초기 상황을 놓고 볼 때 특이한 것이 국방경비대의 태도다. 1946년 모슬포에서 창설된 경비대 제9연대 장병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경비대 측에서는 이 사태를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누적된 도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9연대가 제주 출신 중심으로 편성된 점도 있지만, 경비대와 경찰 간의 미묘한 반목이 깔려 있었다. 미군정은 경찰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그 무렵 9연대 병사들의 기본 병기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낡은 99식 소총이었다. 반면 경찰관에게는 미제 카빈소총이 지급되고 경찰서마다 기관총과 무전기 등 신식 장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경비대 쪽에서는 일제총독부에서 근무했던 친일 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동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있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경찰 쪽에서는 경비대를 사상적으로 문제 있는 청년들을 입대시킨 '불온집단'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었다. 또한 두 집단 사이에는 건국 후 창설될 국군의 모체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신경전도 있었다.

제9연대는 4·3 발발 초기 제주 경찰로부터 몇 차례 지원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묵살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4월 17일 제9연대에게 제주사태에 대한 진압작전에 나서도록 명령함으로써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4월 18일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시달하면서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고 명령한다.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내세웠던 전략, 즉 '선선무 후토벌'이란 단계적 해결방안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4월 22일 김익렬 연대장은 L-5 경비행기를 직접 타고 나가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뿌렸다. 그래서 성사된 것이 바로 '4·28 평화협상'이다. 심층적인 취재와 보도로 지금은 이 평화협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상당히 드러나 있지만, 그 무렵에는 안개 속처럼 흐릿했다.

과연 연대장과 무장대 대표와의 협상은 이뤄진 것인가? 협상의 참석자와 진행 상황은? 협상의 결과는? 이 협상을 미군정은 어떻게 본 것인가? 왜 성공했다는 협상이 파기된 것인가? 그리고 연대장은 왜 해임된 것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4·3취재반은 4·28 평화협상에 곧 이어서 일어난 '5·1 오라리 방화사건'을 주목했다. 방화 행위자가 모호하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9연대 초대 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이 쓴 「육사졸업생」에는 이 방화사건이 '폭도들의 보복행위'란 시각과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는 상반된 주장이 있다고 언급돼 있다.

4·3취재반은 또한 이 예민한 사건이 존 메릴의 논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군 촬영반이 방화 현장을 지상과 상공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 기록영화를 만든 점, 동아일보 특파원이 '종군르포'라면서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폭도들의 소행'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들 사건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평화협상에 참석했다는 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대표 김달삼 등을 만나보아야 했다. 그러나 김달삼은 사살됐다는 소문과 함께 행방이 묘연한 상태고, 김익렬은 1988년 12월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면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은 이윤락 중위가 유일했다. 그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고민하던 차에 「육사졸업생」에 나오는 "이 중위는 이후락씨의 사촌동생으로,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나는 이 문장을 근거로 부산에서 동아대학교를 나온 고홍철 기자(정경부 차장)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윤락 중위를 찾아내라"는 특별한 과제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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