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8> 김익렬 유고록 ③

 
   
 
  2008년 4월 제주4·3평화기념관을 방문한 김익렬 장군의 부인과 아들·딸들이 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가운데 서 있는 이가 미망인 최재선 여사. 2남 3녀 중 큰 아들만 미국에 살고 있다.  
 

"독일에 쉰들러 있었다면 4·3땐 김익렬"
   인기 TV드라마·소설 소재로도 활용돼

김익렬 유고록 ③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이 발표되자 일반 독자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더욱이 제주도 상황을 유혈사태로 몰고 간 초토화작전 발상이 미군 고위층에서 나왔고, '공산 반란'이란 규정도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한 국제 정치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는 내용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 예비역 대장은 "김익렬 장군은 명예욕보다는 정의감이 강했고 물욕이 없었으며, 아첨배들을 멸시하는 직언파여서 손해도 많이 봤으나 후배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한 장성 출신은 "대한민국 군인의 표상으로 삼기 위해 육사 교정에 김익렬 장군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보수 진영의 필진은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 사태를 보는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있었고, 특히 남로당의 전략에 휘말렸거나 간과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일부 군 장성 출신 가운데는 김 장군을 '허풍이 심한 사람'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4·3 연구자 가운데 김익렬의 유고를 의도적으로 비틀려고 한 점이다. 심지어 4·3 봉기가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슬로건 아래 출발했는데, 그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맺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4·28 평화협상'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어떤 연구자는 "유고록에는 평화협상 장소로 추정되는 구억국민학교에서 모슬포 부대가 내려다보인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그 곳에서는 한 오름에 가려서 모슬포가 보이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나는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애써 자위했다.

어떤 회고록이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또 개인의 글이기 때문에 자신을 미화할 수도 있고, 자기 판단에 매몰될 수도 있다. 김익렬 장군도 이 점을 인식했다. 글 말미에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 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라고 단서를 달았다.

한번 상상해 보라. 김익렬 유고가 없었다면 미군정 고위층의 토벌정책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을까? '4·28 평화협상'을 비롯하여 '5·1 오라리 방화사건', '5·3 기습사건'의 실체는? 그리고 회의내용을 극비에 붙인 '5·5 최고 수뇌회의'의 참 모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런 염려는 당시 실제로 일어났다. 제주에서 수뇌회의를 주재한 딘 군정장관은 귀경한 다음날인 5월 6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현지 실정과는 판이한 '거짓 내용'을 진술한 것이다.

첫째는 군과 경찰의 관계이다. 바로 전날 경찰 총수와 현지 연대장이 육탄전을 벌였는데도 "현재의 제주도 분위기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다.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협력하고 있으므로 불원 완전히 평정되어…"라고 표현했다. 둘째는 '공산 반란'으로 몰아가는 전략이다.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과 위협에 잘못 인도된 청년들이…살해하고 방화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김익렬 장군의 유고는 그 후 제주4·3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나 소설에도 많이 인용됐다. 1992년 화제를 불러일으킨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비롯하여 한림화의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1991년), 오성찬의 소설 「죽은 장군의 증언」(2000년), 김시태의 장편소설 「연북정」(2006년)의 소재가 되었다. 최근에는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2010년)에 삽화처럼 언급되기도 했다.

김익렬 유고 원본은 현재 제주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 코너에 전시되어 있다.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바람'이라는 그 코너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힘썼던 독일인 '쉰들러'가 있었다면, 제주4·3사건 때에는 '김익렬 연대장'과 '문형순 경찰서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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