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9> 「사회와 사상」 연재

 "민족사 복원 차원…전국적으로 읽혀야"
  신문연재물 전재 한국 언론사상 드문 일

「사회와 사상」 연재

   
 
  월간 「사회와 사상」은 제주신문 '4·3의 증언' 내용 그대로를 월간지에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은 「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에 첫 선을 보인 '4·3의 증언'  
 

제주신문에 매주 2회씩 '4·3의 증언'이 연재되고, 덩달아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까지 발표되자 4·3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제주 사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발표 내용도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미군정과 경찰의 조작사실까지 들춰내자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공안당국도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제동을 걸고 싶었지만 연재되는 내용들마다 신뢰성 높은 근거가 제시되는 등 빈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 무렵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던 해방 직후의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을 잇달아 출간함으로써 출판계에 새바람을 몰고온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김 대표는 당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잘 읽히는 도서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도 그의 기획 작품이었다.    

김 대표는 나에게 '4·3의 증언' 연재내용을 의미있게 보고 있다면서 월간 「사회와 사상」에 그대로 전재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그는 "이런 연재물이 제주사회에만 알려지는 것이 안타깝고, 민족사의 정당한 복원을 위해서 전국적으로 읽혀져야 한다. 편집위원들과도 상의를 마쳤다"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중앙의 유명 출판사 대표가 4·3에 보여준 관심과 제안은 이제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취재반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월간 「사회와 사상」은 '사상의 대중화'를 내걸고 1988년 9월 창간됐다. 민주화 바람을 타고 진보적 지식인들의 총결집체라는 모토로 창간된 「사회와 사상」의 편집위원으로 강만길(고려대 교수), 고은(시인), 김진균(서울대 교수), 리영희(한양대 교수), 박현채(조선대 교수)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진보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김언호 대표는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언론에서는 매우 드물게 신문 연재물을 내용 그대로 월간지에 발표하게 되었다. 첫 연재는 1989년 10월호에 발표됐다. '한국현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대하기획 집중연재'란 제목이 더 붙여졌고, '편집자의 말'을 통해 연재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이지만 아직도 그 진실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4·3. 제주신문의 4·3특별취재반이 '4·3의 증언'을 특별연재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류투성이의 자료들이 계속 인용되는 오류가 잇따라 저질러지고 있음을 밝혀냈고, 미군과 극우권력이 조작해낸 사건의 시말을 밝혀내기도 했다. 기억해내는 것조차 공포의 대상이 된 4·3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본지는 제주신문의 이 기획취재를 특별취재반과 협의, 정리·보완하여 연재하기로 했다. 역사와 역사의식의 대중화를 위하여 '4·3의 증언'은 널리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지방신문인 제주신문의 배포망은 한정되어 있다. 한국신문 사상 획기적인 기획으로 평가되는 '4·3의 증언'을, 민족사의 정당한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흔쾌히 본지에 싣기로 했다"

이렇게 '4·3의 증언'은 「사회와 사상」 1989년 10월호(통권 14호)부터 1990년 1월호(통권 17호)까지 모두 4차례 발표됐다. '김순애 소녀가 겪은 4·3'을 시작으로 4·28 평화협상, 5·1 오라리 사건, 5·5 최고수뇌회의의 전모와 초토화를 거부한 김익렬 연대장의 시련, 제주도 최고사령관 브라운 대령의 파견 등 1948년 4~5월 상황에 대한 신문 연재내용이 그대로 실린 것이다.

그런데 이 연재는 뜻하지 않게 중단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신문 '4·3의 증언' 연재 자체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것은 1989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제주신문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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