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0> 달라진 「제주도지」 기록

"관변자료 왜곡 바로잡아" 긍정적 평가
 공안당국에선 집필자 교체경위 뒷조사

달라진 「제주도지」 기록

   
 
  1993년 5월 편찬된 「제주도지」 개정판의 4·3기록이 달라졌다고 보도한 기사들.  
 

1993년 5월 제주도가 펴내는  「제주도지(濟州道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언론의 관심을 끈 것은 달라진 4·3에 관한 기록이었다. 「동아일보」는 "4·3사건 재평가 시도 눈길/제주도지, 발발 원인 민중항쟁 측면 제시"란 제목으로, 「한겨레신문」은 "4·3항쟁 객관적 재조명 '제주도지' 발간 눈길/관변자료 일변도 탈피 왜곡 바로잡아"란 제목으로 각각 보도하였다.

「제주도지」는 1982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그 책자에 실린 4·3에 관한 기록을 보면, 군인들에 의해 주민 300여명이 죽임을 당한 '북촌 주민 학살사건'을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시켜 놓았는가하면, 4·3의 도화선이라 할 수 있는 1947년 3·1 발포사건도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는 식으로 기술되었다. 4·3 희생자 숫자, 오라리 방화사건 경위 등 한마디로 왜곡 그 자체였다.

그런데 11년 만에 수정·증보한 개정판에는 종전과는 다르게 정리된 4·3 역사가 실린 것이다. 언론들은 "기존 관변자료의 왜곡 일변도를 바로잡고 이념 틀을 탈피해서 당시 제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제주도의 특수성 등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4·3 정사(正史)'를 새롭게 썼다"고 평가하였다.

개정판에는 논란이 되었던 북촌 주민 학살사건의 가해자를 2연대 군인들이라고 밝혔고, 3·1 발포사건의 진상도 기존 기록과는 다르게 정리되었다. 또한 '해안선에서 5㎞ 이상은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진압하라'는 초토화작전의 구상이 미군정 간부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는 등 미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하였다. 희생자 숫자에 대해서는 2만명에서 8만명에 이른다는 주장과 그 출처를 소개한 뒤 "6·25 이후의 예비검속과 수감자 사망자까지 감안하면 3만명 안팎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개정판의 집필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장 양조훈'이었다. 필자 스스로 이와 같은 내용을 쓰는 것이 민망스럽긴 하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진상규명사와 관련 있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선정된 제주도지 개정판 4·3 집필자는 당시 보수적인 시각에서 4·3에 관한 책을 썼던 고 아무개 교수였다. 제주도지 편찬위원회 역사분과에서 고 교수를 추천한 것이다. 그러자 편찬위 전체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4·3에 대한 진상규명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인데 종전과 같은 시각을 지닌 인사가 4·3을 집필한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일부 위원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분과에서는 이미 집필자가 선정되었다며 버텼다.

그러자 일부 위원들은 또 역사분과가 집필을 담당하는 시기 범위에 대하여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하였다. 즉, 역사분과에서는 제주도제 실시 시점인 1946년 8월 1일 이전 시기에 대해서만 집필해야 하는데, 왜 4·3 발발시기까지 '월경'하느냐는 것이 반박의 취지였다. 논란 끝에 결국 4·3 분야는 정치분과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필자에게 집필을 의뢰한 사람은 정치분과 소위원장인 강대원(원희룡 의원의 장인) 선생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은 제민일보의 4·3연재 등을 통해 기존 관변단체의 4·3기록이 왜곡투성이라는게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학계는 물론 도민사회에서 더 이상 잘못된 기록의 재탕은 안된다는 공감대가 두루 형성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제주도지가 나온 직후 '민중항쟁 측면도 제시' 운운의 기사가 나왔기 때문인지 공안정보기관에서 경위 조사에 나섰다. 담당공무원들이 곤욕을 치렀다. 공무원들은 편찬위원회의 결정 사안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도 어느 정도 이런 문제를 예견했기 때문에 제주도지 4·3 관련 부문 70쪽을 쓰면서 종전에 없었던 각주를 무려 253개나 달았다. 출처를 밝혀 신뢰도를 높이는 측면도 있었지만, 어떤 문제 제기가 있더라도 이에 대응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문제는 당시 제주도지 편찬 책임을 맡았던 김영돈 교수가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뒤얽힌 사정 속에서 제주도지 개정판의 4·3 기록이 확정되었다. 제주도지 개정판의 4·3 기록은 공공기록 부문에서 4·3에 대한 기록이 변화된 출발점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 후에 제주도내 시와 군에서 편찬한 시·군지와 마을지 등에서도 이를 토대로 그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회는 '제주도의회 4·3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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