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1> 제주도의회 4·3특위 ①

   
 
  1992년 각계 여론을 수렴하던 제주도의회 4·3소위원회 위원들이 제민일보사를 방문,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왼쪽에 김영훈 위원과 필자를 비롯한 4·3취재반이, 오른쪽엔 양금석·이영길 위원 등이 앉아있다.  
 

30년 만에 부활된 도의회 4·3 본격 거론
1993년 특위 결성…난산 끝 7명 활동 시작

제주도의회 4·3특위 ①
1993년 3월 20일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는 공공기관에서 처음으로 4·3 공식기구를 출범하여, 4·3을 공론화하고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1988년 출범 이래 민감한 사안마다 공안당국의 뒷조사를 받으며 4·3의 진실을 찾아야했던 4·3취재반으로서는 막강한 원군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는 1949년 지방자치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단되었다. 그 후 지난한 민주화 투쟁 끝에 30년만인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하였다. 도민의 대의기관으로 출범한 제4대 제주도의회로서는 제주도민의 큰 아픔인 4·3 문제 해결이 당면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첫 물꼬는 남원읍 출신 도의원 양금석 의원이 열었다. 1991년 12월 11일 도의회가 구성된 후 처음으로 열린 정기회에서 양 의원은 도정질문에서 "내 자신이 4·3 피해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문을 열고 비장한 어조로 4·3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그는 제민일보의 기획물 「4·3은 말한다」의 프롤로그를 소개한 뒤 "제주인의 자존심을 걸고 4·3의 역사를 바르게 밝혀져야 한다"면서 4·3에 대한 도지사의 견해를 따져 물었다.

이어 단상에 오른 용담동 출신 김영훈 의원은 "도민 화합과 갈등 해소의 차원에서 4·3 치유를 위한 도민 화합의 광장을 마련할 용의가 없는가"고 질문하였다. 이 같은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우근민 도지사(당시는 관선)는 "4·3의 상처 치유는 우리 시대에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보며, 도의회에서나 민간단체에서 화합과 양보로 해결될 수 있는 방안들이 제시가 된다면 도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4·3이 공론화되는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한번 트인 4·3의 물꼬는 막을 수 없었다. 도의회 출범 이후 처음 맞는 4·3 추모일을 앞둔 1992년 4월 2일 오후 제주도의회는 의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긴급 간담회를 갖고 '4·3 44주년을 맞는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그 날 아침에는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이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다.

도의원들은 성명서를 통해 "4·3이 이름 없는 역사가 되어 버린 것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제하고 "제주도의회는 4·3사건 진상특별위원회를 구성, 좌·우익적 편견의 시각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의 목록을 만들어 진상을 규명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도의원들은 이날 4·3 진상규명과 치유를 위한 도의회 차원의 특별위원회 구성 방침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당시 도의회 장정언 의장은 이런 방침에 따라 4·3 해결방안을 의회 운영위원회에서 다루도록 요청하였다. 그래서 4월 13일 김영훈·양금석·윤태현·이영길 등 4명의 의원으로 '4·3관계기구 설치 준비위원회'라는 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소위원회는 먼저 4·3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고 보고, 도지사를 비롯하여 4·3 관련단체, 언론사 등을 방문하며 의견을 교환하였다. 필자도 이때 소위원회 의원들을 만나 4·3취재반 활동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를 밝히고 4·3의 아픔을 풀기 위해서는 도민의 대표기구인 도의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3년 3월 20일 제주도의회 본회의에서 4·3특별위원회 구성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특별위원회 명칭은 논란 끝에 4·3의 성격이 규명되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꼬리표 없이 '4·3특별위원회'라 부르기로 하였다. 위원회 정수는 7명으로 정하였다.

하지만 4·3특위 구성은 순탄치 않았다. '보이지 않은 손'의 작용인지 4·3특위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이익이 있을 것이란 루머가 나돌았다. 한밤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괴전화가 날아들었다. 도의원들은 4·3특위 구성에는 찬동하면서도 막상 특위 위원이 되는 것은 꺼렸다. 소위원회가 구성된 지 1년이 지나서야 특위를 가동할 수 있었던데는 이런 속사정이 깔려 있었다.

난산을 거듭한 끝에 강완철·고석현·김동규·김영훈·양금석·이영길·이재현의원이 4·3특위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위원장과 간사에는 4·3특위 구성의 산파역할을 맡았던 김영훈·이영길 의원이 각각 선출되었다.

4·3특위는 출범 첫 사업으로 코앞에 닥친 4·3위령제 합동 개최를 모색하였다. 그때까지도 유족회는 4·3위령제를, 4월제 공준위는 4·3추모제를 같은 날 각기 다른 장소에서 봉행하고 있었다.

☞ 다음회는 '제주도의회 4·3특위'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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