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미술과 문화
[김유정의 '미술로 보는 세상'] 동계 정온3

▲ 정온의 대문채 인조의 정려문
대문채에 인조가 정온에게 내린 정려(旌閭) 붉은 바탕에 흰 글씨 선명
유배의 형을 진도로 정하자 광해군이 "대정현으로 고쳐 정하라" 명령

동계 정온의 고택

정온의 고택은 할아버지인 승지 정숙(鄭淑, 1501~1563)이 역동에 집을 지어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 고택은 덕유산 줄기가 조두산을 거쳐 시루봉 자락으로 흘러내린 나지막한 산 아래, 평원이 시작되고 수승대의 계류가 돌아가는 지점 가까이 동남향으로 터를 잡고 있다.

이 고택은 초계 정씨 후손들이 살아온 종갓집으로 一자형 대문간채, ㄱ자형 사랑채, 一자형 안채, 一자형 아래채, 곳간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었고, 고택 주위는 토담을 두르고 있다. 정온의 고택 대문채에는 인조가 병자호란의 의절을 잊지 않고 내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정려(旌閭)의 흰 글씨가 붉은 바탕과 대비되면서 또렷하다. 고택의 뒤편 사당에는 정온이, 나라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만이 영원히 모실 수 있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되어 대대로 존숭되고 있다.

현재의 고택은 후손들에 의해 순조 20년(1820)에 중창된 모습이다. 1984년 12월 이 고택의 중요성이 인정돼 중요민속자료 205호로 지정되었다. 고택의 격조는 사랑채와 안채에 있다. 외관상으로 보면 남성 위주의 공간인 사랑채가 처마가 들려 여성 위주의 공간인 안채보다 우람하고 격이 있게 보이지만 실상은 안채가 잔잔하지만 더 품격이 있다.

오히려 안채가 사랑채보다 면적이 더 넓으며, 대청 후면 부위를 한단 더 올려 같은 공간상에서도 공간의 위계를 중요시 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 상부에 간단하지만 포작을 얹어 격조를 더 했고, 대들보의 크기나 쓰임 위치 등이 사랑채에 비해 크고 높다. 지붕 용마루 상부에 사랑채에 비해 부고 한단을 더 올린 것이 안채의 매력이다(정온선생가옥조사보고서, 2008). 현재 고택을 지키는 사람은 정온의 15대 종손인 정완수(70세) 선생과 정 선생의 부인 종부(宗婦) 최희(崔熙)여사다.  

▲ 격조 있는 정온의 고택
여덟 살 영창대군의 역모

광해군 5년(1613) 정온이 45세가 되던 해 4월에 영창대군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영창대군이 역모를 꾸민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은 서자 일곱 명이 저지른 살인강도 사건인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였다.

이들 일곱 명의 서자들은 도적이 돼 조령(鳥嶺) 고개를 지나는 서울 부자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범인을 잡고 보니 놀랍게도 장안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서자(七庶)들이었고, 이 사건을 대북파가 '역모의 옥(獄)'으로 둔갑시켰다. 이이첨의 계책에 따라 정항이 말하길, "네가 우리말대로만 한다면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고, 큰 공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꾀니 앞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박응서는,

"우리는 보통 절도범이 아니라 장차 큰일을 일으킬 생각으로 양식과 병기를 마련하고, 김제남(선조의 장인, 인목대비 아버지)과 몰래 통하여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거짓 진술을 했다. 

서양갑 또한 박응서를 따라, "김제남이 반역을 계획하여 모두 지휘했고, 인목 대비도 모의에 참여했다."고 말을 꾸밈으로써 김제남 일가는 폐가하게 되고, 훗날 인목대비 또한 폐위돼 서궁(西宮)에 갇히게 되었다. 박응서와 서양갑의 거짓말로 광해군은 영창대군과 김제남,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역모 사건에 옭아매는 구실을 만들 수 있었으나, 세상에서는 어두운 임금(광해군)이, 스스로 나라를 잃게 된 죄는 서양갑의 꾀에 넘어간 때문이라고 수근 거렸다. 결국 일곱 명의 범인 중 박응서만 살고 여섯 명은 사형을 당했다. 

정온은 이 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을 만났을 때 정색하며 물었다.

"여덟 살의 어린 아이가 어찌 역모를 알겠습니까. 그 자전(慈殿:인목대비)이 수라를 전폐하고 함께 죽으려 한다고 하니, 만일 불행한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공들이 뒷날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이첨은 화를 버럭 내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

"설령 대비(인목대비)를 폐위시키더라도 안 된다고 할 자가 누가 있겠소!"

대비 폐위까지 거론하는 말을 듣자 정온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바로 이이첨과 절교하였다. 후일 정온이 우연히 남의 집에서 이이첨을 만났을 때 그를 보자 자리를 일부러 피하니 이이첨은 정온을 크게 원망했다. 

광해군은 김제남에게 사형을 감하여 절도로 유배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극구 사형을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김제남을 사사하기에 이르렀고, 김제남의 세 아들도 모두 형장의 원혼이 되었다. 김제남의 며느리 정씨는 아들 김천석이 죽었다고 하여, 선산에 거짓 장사를 지내고는 아들을 남루한 의복으로 갈아 입혀 몰래 중들과 숨어 지내게 했다. 11년 동안 음지에 있던 천석은 인조반정 후에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김제남의 아내는 죽음을 겨우 면하여 제주 섬에 위리안치 되었다.

또한 어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돼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곽재우(郭再祐)는 영창대군을 위해 "죽일 만한 죄가 없는 것은 온 나라의 백성과 천지의 귀신들도 아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조정에서 영창대군을 목 베자는 거론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소(疏)를 올렸다.

강화부사 기협(奇協)은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초기에 의금부도사를 협박하고 영창대군을 끝까지 보호하려 하자, 이이첨은 서둘러 강화 부사를 정항(鄭沆)으로 교체하였다. 1614년 2월 9일, 정항은 영창대군을 밀실(密室)에 가두고 뜨겁게 불을 지펴 열기로 질식시켜 죽였다.

여덟 살에 비운의 생을 마감한 영창대군은 선조의 정비(正妃) 인목왕후의 소생으로 국혼(國婚) 4년 만인 1606년에 태어났다. 당시 선조의 나이는 54세, 머리가 희어갈 때쯤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국이 급한 탓에 절차를 밟지 않는 의식인 '권정례(權停例)'를 올려 공빈 김씨(恭嬪金氏) 소생의 서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왜군이 물러간 후 김제남의 딸 인목왕후에게서 적자(嫡子)가 탄생하자 선조의 마음은 흔들렸다. 선조가 열네 명의 아들 가운데 유일한 정비(正妃) 소생의 영창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안 유영경과 여러 대신들은 광해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광해군은 점점 불안한 나날을 보냈고,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서 마음이 급해졌다. 이 무렵 북인 내부는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는데, 정인홍·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을 필두로 한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을 지지하다가 선조에게 미움을 사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을 위시한 소북파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뜻을 두었으나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죽자 황급히 유영경은 인목대비를 찾아가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마지막 선조의 유교(遺敎)도 지킬 수가 없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과 소북파는 즉각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권력이 무상하다는 것이 결코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이첨은 죄인에서 일약 예조판서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져 권력의 중심에 섰다. 

당시 즉위한 광해군의 나이는 33세. 즉위하자마자 임해군을 유배 보낸 후 나중에 역모 구실을 만들어 죽였고, 영의정 유영경은 즉시 파직시킨 다음 즉위한 해 6월에 사사했다.

광해군을 지지한 이이첨은 후일 선조의 손자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을 무옥(誣獄)을 일으켜 죽이고, 단순 강도 살인 사건을 '박응서의 옥'으로 조작하여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게 했다. 또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고, 소북파를 상대로 생살(生殺)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 고택을 지키는 정온의 15세손 정완수 선생
목숨을 건 정온의 상소

어린 영창대군이 죽자 정온은 먼저, 강화도로 가서 정항이 영창을 학살한 전모를 비밀리 탐지하여 돌아온 후 광해군에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올렸다.

"전하께서 불행히도 인륜의 변고(變故)를 만나서 사나운 무부(武夫)의 손을 빌려 영창을 죽게 했으니, 전하의 덕에 큰 누(累)가 되었습니다." 로 시작되는 상소는 '정항을 참수하고 영창대군의 칭호를 회복시켜 대군의 예로 장사를 지내달라는 것, 그리고 대비를 폐하고 영창을 죽이라고 맨 먼저 말을 꺼낸 정조(鄭造)·윤인(尹?)·정호관(丁好寬)을 멀리 귀양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아침밥을 막 먹으려던 참에 올라온 정온의 상소를 읽던 광해군은 "정항을 목 베지 않으면 선왕의 묘정(廟廷)에 들어가실 면목이 없게 될 것입니다." 라는 대목에 이르자 대노하여 밥상을 엎어버리고, 상소를 가져온 시녀의 머리를 때렸다. 또 "사나운 무부(武夫:정항)의 손을 빌려 영창을 죽게 했다."는 대목은 어린 동생을 죽인 광해군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이고, 그것에 일침을 가했으니 광해군이 흥분하여 아침밥상을 엎을 만도 했다.

이후부터 '정온이 곧은 말을 했다'고 동조하는 자가 있으면 같이 역적으로 지목되었다. 광해군은 정온을 위리안치 정도로는 안 된다고 하여 특별히 무거운 벌로 다스리라고 명령을 했다. 조선 천지는 신하들끼리 정온을 두고 쟁론이 벌어졌다. 이원익과 정창연, 기자헌이 목숨을 걸고 정온을 구하니, 사형은 면하게 되었다. 1614년 7월, 의금부에서 진도로 위리안치를 정하자 광해군이 직접 "대정현으로 고쳐 정하라." 고 하여, 제주목 대정현에 위리안치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유생들의 생각은 극과 극을 달렸다.  

여산(廬山)의 유학(幼學) 송흥주(宋興周)는 정항을 목 베고 정온을 용서해줄 것을 청하였다가 광해군에게 불려갔다 살아 돌아왔다. 일찍이 정온에게 배운 거창의 진사 형효갑(邢孝甲)은 정온을 죽이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정언(正言) 오장(吳長)은 정온을 구하려다가 나주로 귀양 갔다. 성균관 유생 몇은 정온과 송흥주를 목 벨 것을 청 한 후 정온을 편 든 자에게 죄를 주라고 했고, 어떤 유생은 정온을 이명, 송흥주와 더불어 3적(賊)이라고 비난했다. 권력의 무상함이 멀리 있지 않았다. 정항은 파직돼 옥에 갇혔다가 나오자마자 사람을 보내 정온에게 사과했고, 그 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홧병을 얻어 죽었다. 영창을 죽이라고 맨 처음 말을 꺼냈던 정호관은 정온의 상소문을 본 후, 밥도 먹지 않고 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죽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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