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1> '대만2·28사건' 취재기 ②

대만2·28사건 50주년인 1997년 2월 28일 거행된 '2·28기념관' 개관식 모습

끈질긴 노력, 보상·국가기념일 제정도 쟁취
중앙·지방 수장에 따라 과거사처리 달라져

'대만2·28사건' 취재기 ②
1988년 집권 초기 2·28사건을 역사에 맡기자고 발을 빼려던 대만 리덩후이 정부는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정부 차원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로 그 방향을 선회하였다. 리덩후이 총통은 1990년 11월 정부 산하에 2·28사건 연구와 해결방안을 위한 전담기구 구성을 지시하였다. 1991년 1월 정부 행정원(총리실) 산하에 '2·28사건 전담 소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기구가 1년여의 진상조사를 거쳐 1992년 2월 「2·28사건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40만자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사건의 배경, 경위, 진압과정, 피해상황 등을 기록한 본문 2권에다 당시 관련자의 증언과 역사자료 등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집 10권으로 짜여졌다. 이 보고서는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집계할 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망·실종자가 1만8000~2만8000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 이전에 대만 군 당국이 밝힌 이 사건의 피해자는 사망 408명, 부상 2131명, 실종 72명에 불과했다. 이 또한 제주4·3의 경우와 비슷하다.

대만 정부는 이 사건의 사후처리를 놓고도 주춤거렸다. 이 문제를 당면한 정치문제로 이끌어낸 세력이 바로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이었다. 소수의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진당은 오랜 투쟁 끝에 1986년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았다. 이 정당은 대만의 독립을 기치로 내세웠고,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첫 목표로 2·28사건 진상규명을 내세워 대만 원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이 1994년 타이페이 시장 선거에서,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타이페이시 2·28화평공원에 세워진 2·28기념탑
민진당은 1994년 2·28사건 수난자 모임(유족회)을 적극 대변하며, 정부의 공식 사과, 책임자 추궁, 희생자에 대한 배상, 국가기념일 설정 등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입법원(국회)에 '2·28사건 처리 및 배상조례'를 상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공식 사과를 하게 되었고, '2·28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가 입법원을 통과하였다. 다만 국민당의 반대로 조례 명칭은 '배상'에서 '보상'으로 바뀌었다. 이 조례는 수난자에게 1인당 최고 대만화폐 600만원(한화 1억8000만원)까지 보상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심사로 보상금을 받은 수난자는 4000여명에 불과했다.

1997년 2월 28일은 2·28사건 5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타이페이시 한복판에 자리잡은 '2·28화평공원'에서는 기념식에 이어 '2·28기념관' 개관과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기념비 제막이 거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제민일보 4·3취재반 김종민 기자가 취재하고 있었다. 한·중·일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타이페이시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주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 취재를 겸해 대만으로 간 것이다.

대만 현지에서도 기념비 비문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주로 장제스의 책임문제와 사건의 성격에 관한 논쟁들이었다. '항쟁'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기념비에는 '2·28기념비'로만 새겨졌다. 대만 현지 신문은 이를 '유비무문(有碑無文)'이라고 표현하였다. 2008년에 개관된 '제주4·3평화기념관'에 '백비(白碑)'를 설치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2000년 민진당 천수이볜이 정권을 잡은 뒤 2월 28일이 국가기념일로 정해졌다. 또한 2·28사건의 책임문제에 대한 진상조사가 다시 진행되어 '유혈 진압의 주책임자는 장제스'로 결론을 내린 보고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국회의원인 장제스의 손자가 '조부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고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필자는 2006년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으로서 4·3중앙위원회 위원들과 대만 '2·28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늘하고 딱딱했다. 그 이유를 알아본즉 타이페이 시장이 민진당 출신에서 국민당 출신으로 바뀌면서 기념관 운영체제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즉 종전에 재단법인 '2·28화평기금회'가 수탁 관리할 때에는 활성화되었는데, 그 이후 타이페이시 문화국 직영체제로 전환돼 공무원들이 기념관 운영을 맡으면서 관료화되었다는 것이다. 

리영희 교수는 대만2·28을 '4·3의 거울'이라고 했다. 피해상황이나 강요된 침묵, 그리고 그 속을 뚫고 나온 진실규명과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면, 대만2·28이나 제주4·3 같은 과거사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중앙정부의 수장이나 지방정부의 책임자가 어떤 성향의 인물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회는 '리영희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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