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8> '불법계엄령' 보도 논쟁②


1997년 4월 1일 "4·3계엄령은 불법"이라고 보도한 「한겨레신문」(왼쪽)과 「제민일보」의 기사.

식민지 때도 선포안된 계엄령으로 주민 학살
정당·시민단체 "불법 계엄령" 진상규명 촉구

'불법계엄령' 보도 논쟁 ② 
'4·3계엄령이 불법'이란 취재 결과에 우리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벌어진 초토화 작전 때 군경토벌대는 팔순 노인에서부터 서너살 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행위는 국제법에서 용납될 수 없는 불법적인 것이다. 하물며 그 법적 토대를 이루는 계엄령 선포마저 불법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필자는 이 사실을 보도하기에 앞서 「한겨레신문」에 알리도록 하였다. 한겨레신문은 당시 중앙지 중 유일하게 4·3의 진실 규명을 위한 활발한 보도를 해왔다. 그래서 1997년 4월 1일 「한겨레신문」은 허호준 기자, 「제민일보」는 진행남·김종민·김애자 기자의 기명 기사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당시 한겨레는 조간, 제민은 석간이었다. 제민이 몇시간 늦게 보도되는 불이익을 감수한 대신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국에 알리는 효과가 컸다.

보도가 나가자 곧 반향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갓 출범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를 비롯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제주4·3연구소, 제주범도민회와 12개 전국 시민운동단체들이 일제히 성명을 발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의 법률적 입장을 대변하는 법제처가 즉각 반론을 제기하였다. 반론의 요지를 정리하면, ① 일제하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 칙령에 따라 일본의 계엄령이 시행됐다 ② 해방 후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는 군정법령(제21호)에 따라 일본의 계엄령이 존속됐다 ③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헌법(제100조)에 의해 일본의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즉, 제주4·3 때의 계엄 선포는 비록 당시까지 한국의 계엄법은 없었지만, 그때까지 계속 효력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계엄령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는 주장이었다.

법제처의 반론을 계기로 계엄령을 둘러싼 문제는 법 해석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되었다. 4·3취재반은 법제처가 4·3계엄령의 법적 근거로 내세운 '일본 계엄령'에 대해서도 일본 헌법학자의 자문을 받으면서 그 사실관계를 조사하였다. 1882년에 제정된 일본 계엄령은 1913년 일제 칙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 계엄령은 '관동대지진'(1923년) 등 일본에서 모두 3차례 발효되었을 뿐, 식민지 조선에서는 단 한번도 선포된 바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런 일본 계엄령이 같은 민족을 학살한 4·3계엄령의 근거라니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일본의 계엄령이 과연 해방 후 제주에 계엄이 선포될 때까지 존속했느냐?'는 법률적인 해석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순태 교수(한국방송대·법학),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역사학) 등은 "법제처의 해석이 법률적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토 없이 급히 보도 내용에 대응하려다보니 그런 근거를 제시한 것 같다"면서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제민일보」가 이와 관련한 문제점을 계속 제기하자 법제처는 문제의 보고서에 대해서 "정식으로 문서화된 게 아니라 내부적으로 한번 검토해본 메모에 불과하다"고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1997년 7월 8일 국회 법사위에서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신문보도를 토대로 '불법 계엄령' 문제를 따져 물었을 때에도 법제처는 4·3 때의 계엄령이 일제법에 근거하였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였다.

 이 문제는 법률학계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언론 보도가 나간 이후 김순태 교수의 '제주4·3 당시 계엄의 불법성', 김창록 교수(부산대·법학)의 '1948년 헌법 제100조-4·3계엄령을 통해 본 일제법령의 효력', 이승용 변호사의 '4·3, 그 문제와 해결의 법적 측면' 등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인수)가 '불법 계엄령' 보도에 대해 1997년 10월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정정보도'를, 1999년 8월 제민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4·3계엄령 문제는 새롭게 부각되었다. 결론을 말하면 이 송사는 원고가 패소한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여담 한가지만 덧붙이겠다. 「동아일보」가 1997년 4월 29일자에 필자의 인터뷰 박스기사로 '4·3계엄령 위헌' 사실을 보도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성향으로 볼 때 제민일보 편집국장의 인터뷰기사를 실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필자는 한국기자상 수상 기념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주선한 베트남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행했던 동아일보 문화부장(김충식)의 입김이 작용해서 그 기사가 나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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