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79> 수난 이겨낸 4·3다큐

영어·일어 등으로 번역돼 외국서 상영
제주MBC, 활발한 4·3다큐의 제작 눈길

수난 이겨낸 4·3다큐

감독 구속 사태를 불러온 '잠들수 없는 함성 4·3항쟁'의 첫 화면(위). 1만 5000명의 희생자 명단을 자막으로 내보내 충격을 줬다.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 4·3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거나 상영했다는 이유로 감독 등이 구속되면서 파장이 일어났다. 독립다큐멘터리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 감독인 김동만과 「레드헌트」를 상영한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잠들 수 없는 함성」은 제주 출신 김동만 감독이 1995년에 제작한 작품(56분 분량)이다. 4·3의 원인과 성격, 피해의 참혹성을 민중항쟁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특히 작품 뒷부분에 16분 동안이나 학살당한 1만5000명의 희생자 명단을 자막으로 내보냈다. 당시로는 충격적인 표현이었다. 이 다큐는 전국 대학에 유포되었는데, 사직당국에서 뒤늦게 문제 삼은 것이다.

'빨갱이 사냥'이란 뜻의 「레드헌트」(Red-Hunt)는 1997년 부산 출신 조성봉 감독이 만든 다큐(67분)이다. 조 감독은 왜곡된 한국현대사의 근원을 찾다가 4·3과 맞닿게 됐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체험자의 인터뷰를 통해 대량학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냈고, 이승만 정부와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이 다큐는 그해 10월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는데, 사전에 심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권영화제를 주최한 인권운동가가 구속된 것이다. 

난데없는 공안정국에 시민사회가 반발했다. 탄압을 받은 두 작품은 오히려 전국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4·3을 외국에까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즉 「잠들 수 없는 함성」은 일본어, 중국어 자막이 들어간 비디오로 출시되어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상영됐다. 또 「레드헌트」는 베를린 영화제, 암스테르담 영화제 등에 초청됐고, 영어로 번역돼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 스위스 등지에서 상영됐다. 이들 작품은 2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이적 표현물이 아니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동만 감독이 소속된 '4·3다큐멘터리제작단'은 이에 앞서 다랑쉬굴의 유해 발굴 과정을 다룬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1993년)를 제작한 바 있고, 그 이후로 「제주도 메이데이의 실체」(1998년), 「무명천 할머니」(1999년), 「유언」(1999년), 「일본으로 간 4·3위령제」(2001년) 등 4·3다큐를 활발히 출시했다. 또 조성봉 감독의 '하늬영상'에서는 1999년 증언자 12명의 목소리를 통해 학살자의 정체를 추적해가는 90분짜리 「레드헌트 2」를 만들어 영상을 통한 4·3 진실찾기에 한몫했다.

한편 4·3다큐 제작은 공중파 방송에서 먼저 시작했다. 앞에서 밝혔지만 1989년 4월 제주MBC의 '4·3기획-현대사의 큰 상처' 방영이 그 시초이다. 제주MBC는 그 이후 '묻힐 수 없는 외침'(1990년), '잃어버린 고향'(1991년), '마지막 증언'(1992년), '이념의 대결은 없다'(1993년), '4·3의 국회청원'(1993년), '다시 찾은 역사'(1994년), '한의 세월 반세기-북촌사람들'(1998년) 등을 제작·방영했다. 이 모든 작품은 김건일 기자가 연출했다. 1999년에 만들어진 '4·3 인권보고서-다랑쉬굴의 침묵'은 송창우·김찬석 기자가 제작했다.

초기의 다큐는 4·3의 숨겨진 아픔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공산폭동론'과는 다른 기억이 있음을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공중파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간 것이다. 그리고 점차 4·3의 성격과 대량학살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진실 찾기에 그 초점을 맞추어 나갔다.
제주MBC는 아울러 1999년 5월부터 편성국(오석훈 PD)에서 만든 '4·3 증언-나는 말한다'라는 프로를 매주 방영했다. 마을별로 순례하며 현장 취재 내용과 체험자의 증언을 방송했다. 그러다보니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내용과 겹치는 부분도 많았다. 이 프로는 2001년 11월까지 모두 105회나 방송됐다.

1999년에는 중앙 MBC가 4·3을 집중 조명했다. MBC가 덮여진 의혹의 현대사를 파헤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를 기획했는데, 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제주4·3을 선정한 것이다. 이 때 이채훈 책임 PD가 4·3취재반을 찾아와 장시간 의견을 나눴다. 그해 9월 12일 비록 50분의 제한된 시간이지만 중앙 공중파 방송으로는 처음으로 4·3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방송했다. 그 반향은 컸다. 4·3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프로였다.

이에 반해 KBS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주KBS의 첫 4·3 프로는 1989년 6월에 방송된 '영원한 아픔 4·3사건'(김기표 PD)이었다. 이어 중앙 KBS가 제작한 '해방과 분단: 제1편 제주도-4·3전후'가 1990년 2월 방송 예고됐다가 제동이 걸려 불방됐다. 그 이후로 오랜 동면에 들어갔다. 그 다음 방송된 작품이 2000년 3월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김영훈 기자)이었으니, 무려 11년이란 공백이 생긴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중앙 KBS가 1994년 '책과의 만남' 프로에서 「4·3은 말한다」를 화제의 책으로 1시간 동안 전국에 방송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담당 PD의 결단과 강한 행동이 KBS에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회는 '종교계 4·3 진실찾기'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