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1> 4·3유족회의 변화

1996년 제주시 탑동에서 열린 4·3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신구범 지사와 함께 분향하고 있는 오선범 유족회장(왼쪽). 그는 이 위령제에서 4·3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토벌대 피해 입은 유족들이 지도부 장악
4·3단체와 연대… 특별법 제정운동 동참

4·3유족회의 변화
제주4·3특별법 제정운동 과정에서 4·3유족회의 변화도 큰 변수가 됐다. 반공유족회로 출발한 4·3유족회가 그간의 입장을 바꾸어 진상규명운동 세력의 일부로 편입했고, 특별법 제정운동에도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1988년 10월 30일 출범한 유족회의 이름은 '4·3사건민간인희생자반공유족회'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4·3에 대한 금기의 벽이 무너지고 '민중항쟁론'이 대두되자 주로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희생자 유족들이 자극을 받아 서둘러 반공유족회를 결성한 것이다. 초대 회장은 경찰관 출신인 송원화, 사무국장은 박서동이 맡았는데, 모두 반공유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딜레마에 빠졌다. 지역별로 유족들의 입회를 권유하는 과정에서 '반공유족회'란 명칭에 대해 많은 불만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반공유족들보다 '토벌대에 희생당한 유족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반공유족회는 위령탑을 건립할 성금을 모집했는데, 역시 '진압과정에서 희생된 유족들'을 배제하고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1990년에 궁여지책으로 '반공'을 뺀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로 개칭했다. 비록 반공유족회에서 민간인희생자유족회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조직은 여전히 반공유족들이 주도했다. 제2대 김병언 회장도 그 가족이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유족이었다.

그 유족회가 역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시민사회단체가 벌여오던 '4·3 추모제'에 대응해 '4·3 위령제'를 개최하는 일이었다. 시민사회단체인 '4월제공준위'는 1989년부터 추모행사를 벌여왔는데, 유족회는 1991년부터 별도의 위령제를 거행했다. 양분된 위령행사도 문제지만, 4월제공준위가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유족회는 "4·3은 공산폭동이기 때문에 구태여 진상조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도민사회로부터 빈축을 받던 이런 상황을 제주도의회가 나서서 중재에 나섰다. 특히 도의회는 공동위령제에 합의하지 않으면 제주도의 행사비 예산지원을 못하도록 하겠다고 압박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94년부터 합동위령제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두 단체의 입장 차이는 합동위령제를 치른 후에도 여전했다.

그런데 이러한 유족회의 입장이 1996년에 이르러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에 회장단이 개편됐는데, 회장 오선범, 사무국장 양영호 등 핵심 임원들이 토벌대에서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맡게 된 것이다. 새로 유족회를 이끌게 된 오선범 회장은 1996년 4·3 희생자위령제 때 4·3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역설하기에 이른다. 그 전해와 비교할 때 180도 달라진 것이다.

오선범은 그 이듬해 서귀포시의회 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유족회장직을 사임하는데, 그 후임에 박창욱(1997년)이 맡게 된다. 그 이후에도 이성찬(2001년)-김두연(2005년)-홍성수(2009년)에 이르기까지 유족회 회장은 토벌대와 무장대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토벌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선임됐다.

유족회의 성격 변화는 정관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2조 유족회 목적이 1990년대 후반까지도 "1945년 8·15광복 이후 4·3사건과 관련하여 희생된 민간인의 원혼을 위로하며 나아가서는 자유민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고 좌경세력에 대처함은 물론이고 전후 세대에 대한 국민정신함양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4·3을 치유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고 되어 있었다. 그 내용이 지금은 다음과 같이 개정돼 있다.

"본회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발생한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자의 법적·제도적 명예회복을 위한 제반 사업을 통하여 진정한 4·3해결을 이루어내고, 그 기반 위에서 도민화합과 평화인권신장에 기여함은 물론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반공을 앞세워 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유족회의 이런 변신은 4·3특별법 제정운동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종전까지 대립각을 세우던 4·3운동단체와도 협력과 연대의 관계로 바뀌었다. 1999년 3월 도민연대·범국민위원회와 공동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 채택, 4월 지방의회와의 전국홍보 및 국회 방문활동, 10월 20여개 시민단체와의 연대회의 결성 등 주요한 행사에 유족회가 공동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다음회는 '서울 4·3촉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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