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9> '불법계엄령' 보도 송사 ②

2000년 7월 20일 제주지법이 4·3계엄령 보도와 관련한 소송에서 제민일보에 승소판결을 내리자 4·3관련단체 관계자와 유족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인수 측 청구 기각되자 4·3진영 환호
대법원 판결문 4·3보고서 작성 때 활용

'불법계엄령' 보도 송사 ②
2000년 3월27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가 '4·3계엄령은 불법'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청구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5차 공판이 열린 제주지법 법정은 4·3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로 가득 찼다. 방청석 한켠에는 이인수 쪽을 지지하는 반공인사와 경우회 임원들이 자리를 잡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날 법정에서 피고 측 증인 5명이 차례로 증인석에 섰다. 김홍석(의귀리)·오국만(가시리)·양복천(교래리)·고남보(소길리)·임완송(와흘리) 등 증인 5명은 모두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었다. 이 소송의 쟁점은 계엄령의 불법성과 양민학살의 실체 여부 등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피고 측 문성윤 변호사는 양민학살의 실체를 입증하기 위해 유족들을 증언석에 세운 것이다. 문 변호사는 이에 앞서 4·3취재반과 함께 증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피해 실상에 대한 증언을 듣는 등 사전 준비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증인 5명은 저마다 50여년전의 참상을 또렷하게 진술해 법정을 숙연케 만들었다. 그런데 원고 측 반대신문이 벌어지면서 일순 분위기가 바뀌었다. 원고 측 변호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불참하는 바람에 소송 제기 당사자인 이인수가 직접 신문에 나섰다. 그가 4·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시작하자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이런 흥분된 분위기는 양복천 할머니에 대한 반대신문 과정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이인수는 "토벌대가 9살 난 아들을 사살하고 나에게도 총을 쏘는 바람에 옆구리를 관통, 등에 업힌 3살 난 딸의 다리를 박살냈다"는 양 할머니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폭도들이 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가하면 질문지를 양 할머니 얼굴 쪽으로 들이댔다. 그 순간 방청석에서 "글자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무슨 짓이냐?"는 고함이 터졌다.

재판장인 김창보 부장판사가 "고함을 지른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때 "접니다"하면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공동대표 송승문이었다. 재판정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법정 소란죄로 퇴정을 명할지, 아니면 감치처분을 내릴지 모든 시선이 재판장의 입으로 쏠렸다. 사안이 미묘해서인지 재판장은 몇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하세요"란 말로 끝을 냈다. 공판이 끝난 후 이인수는 거칠게 항의하는 유족들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다 재판정 뒷문으로 피신했다.

이 소송은 제민일보 쪽이 승소했다. 제주지법 민사합의부는 2000년 7월20일 선고공판을 통해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는 "제주도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었고, 무장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주민들이 재판절차도 없이 살상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재판부는 '4·3계엄령 불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계엄이 법령에 근거 없이 선포된 위법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계엄선포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노심초사하던 4·3 진영은 재판부가 정정보도 뿐만 아니라 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이인수 측의 무리한 요구에 쐐기를 박고, 4·3 당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일제히 환영했다. 이날 선고공판장에는 연로한 유족들도 많이 나왔는데, 기각 판결이 나오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원고 측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항고했지만 2심인 광주고법 제주부는 2000년 12월 22일 역시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러자 원고 이인수는 대법원으로 상고했고, 대법원은 2001년 4월27일 관여 대법관 4명의 일치된 의견으로 원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사법절차상 최종심인 대법원의 판결은 소송사건을 확정시킨다는 점에서 현대사 최대비극인 제주4·3에 대한 제민일보 보도의 진실성을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입증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그동안 금기시되고 터부시됐던 4·3 당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을 인정했다는 점도 그 의미가 컸다. 필자 등이 나중에 정부 차원의 4·3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이 대법원의 판결문을 유익하게 활용했다.

한편 이 소송을 승리로 이끈 문성윤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약 '4·3 변호사'란 명성을 얻게 됐다. 그는 이후에도 4·3중앙위원회의 헌법소원 및 행정소송과 4·3유족회의 민사소송 등을 맡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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