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 포구와 도대불로 엿 본 제주 해안길

▲ 김녕 옛 등대. 도대불은 현대식 등대가 설치되면서 쓰임을 잃었따고 알려지고 있지만 제주시와 멀리 떨어진 어촌에 전기가 들어온 시점이 1970년대인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이때까지도 제주를 향하는 배의 길잡이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삶을 위한 목숨 길·새로운 문명의 관문 등 하나둘 소실
문화콘텐츠 활용 기대감 '가치'평가 없이는 무용지물

제주 바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거기에 겨울이라는 계절까지 등에 업으면 그 기세가 더 등등하다. 그 바람을 뚫고 바다에 나가야 했던 섬사람들의 발길과 한숨으로 반질반질 닳고 닳은 길목에 섰다. 섬에서는 더 없이 소중한 바다 밭으로 나서는 길이지만 목숨을 걸어야하는 삶과 죽음의 기로이기도 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래도 무언가 긁적긁적 마음 끝을 긁어댄다. 시간이 어그러진 틈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이다. 뱀이 허물을 벗어놓은 것처럼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생한다.

# 포구 옛 쓰임 대신 문화콘텐츠로

섬사람들의 기억에서 이것을 지우면 남는 게 없을 만큼 바다의 존재감은 크다. 그런 바다로 나가는 길이 다름 아닌 포구다. 과거 제주에는 160여곳의 포구가 있었다. 포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주변에 도대불(등명대·등대)이며 방사탑, 봉수대, 연대 등이 있었다. 그것이 불과 20~30년 전 일이다. 지금은 옛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했다.

제주 해안의 상징물이던 포구는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편의성' '현대화' 등을 앞세운 증·개축으로 목이 잘려나가면서 많은 부분 이름과 기억만 남았다. 많은 포구가 마을이나 지경, 지형지물에서 이름을 따왔다. 예전에야 휘휘 둘러보는 것으로 절반 이상 이름을 맞출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옛 자료나 표지판, 오래 지역에 산 어르신들의 설명 없이는 알 수 없다.

포구는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의 시간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전복이나 말 ,귤 같은 조공품을 진상하던 창구였으며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고 소금 등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결연히 나서야 했던 길이기도 했다. 몽골과 왜구 등 외세의 침입에 무너졌지만 반대로 외부의 문화·문물을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도 했다. 그래서 해안 마을이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포구를  가지고 있었다. 다 옛 말이다.

▲ 화북포 뱃길.
수중 암초가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화산섬지형의 약점을 강점으로 활용한 옛 선인의 지혜가 담긴 공간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대신 지금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새로운 쓰임을 찾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 제주읍성 민초들의 젖줄이자 제주의 관문이었던 산지천과 산지포구(건입포구)에는 조선시대 여성 거상(巨商)인 김만덕 객주터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 제주로 유배를 오던 선비들이 거쳤던 화북포구는 매년 해신제를 지내는 것 외에 최근 공공미술의 옷을 입었다.

성산리 오조리 포구와 어등개, 남원읍 하례 1리 망장포 등 원형이 남아 있는 포구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체계적인 실태조사와 활용방안에 대한 주문이 잇따르고 있지만 아직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제주올레가 활성화되면서 '포구'가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온평포구(3코스)·당케포구(4코스)·남원포구·망장포구(5코스), 보목항·구두미포구(6코스), 법환포구·강정포구(7코스), 월평포구·대포포구·하예포구(8코스), 대평포구(9코스), 화순항·사계포구(10코스), 자구내포구·용수포구(12코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이름표 하나 달지 못했다는 것이 뭇내 마음에 걸린다.

▲ 사진작가 서재철의 사진집 「기억속의 제주포구」 중.
# 도대불에서 시간을 읽다

포구를 얘기하면서 또 하나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빛을 통한 소통유적' 도대불이다.

옛 민간등대 격인 등명대(燈明臺·도대불)는 여러 조사 등을 통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의견이 제기됐지만 아직껏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일명 도대불의 어원으로 돛대처럼 높은 대(臺)를 이용해 불을 밝힌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배가 오가도록 길(道)을 밝힌 대(臺)라는 설, 등대(燈臺)란 뜻의 일본어 '토우다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든 전기 시대가 본격화하기 전인 1957년 세워진 용담 등명대와 '대정4년(1915) 12월 건립' 표기된 비석이 세워진 북촌 등명대로 미뤄볼 때 1910~1940년에 축조됐으며 바닷길을 지키는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덕희 미국 하와이주 전 DHM inc 환경계획연구소 대표가 1997년 출간한 「제주의 도대불」에는 총 17기의 도대불이 확인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념비가 남아있는 것은 1915년 12월에 세워진 조천읍 북촌리의 도대불이고, 가장 최근에 지어진 것은 1969년 7월에 완성된 구좌읍 하도리의 도대불이다.

도대불은 솔칵(썩은 나뭇가지)으로 불을 지폈거나 생선기름을 이용한 호롱불 아니면 석유등피를 사용했다.

대부분의 도대불은 해질 무렵 뱃일을 나가는 어부들이 불을 켰고, 아침에 배가 들어오면 껐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해안도로 개설과 방파제 공사 등으로 하나둘 사라지고 불편한 플라스틱 조형물이 불인양 세워져 있기도 하다.

1930년대 만들어졌다 1961년 재축조된 김녕 도대불은 당시 군청에서 구호물자인 밀가루를 지원받은 석공 7명이 12일 동안 축조했다는 내용의 채록(석공 강정남)만 남아있고, 여든을 훌쩍 넘긴 고재순 할머니의 기억에는 예전 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생선이나 쌀을 주면서 애월 도대불에 '각지불(석유등)'을 켜달라는 부탁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1906년 제주에 처음 세워진 우도의 등대를 도대불이라고 부르다가 해방 후부터는 등대로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도대불은 현대식 등대가 설치되면서 쓰임을 잃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제주시와 멀리 떨어진 어촌에 전기가 들어온 시점이 1970년대인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이 때까지도 제주를 향하는 배의 길잡이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주의 첫 현대식 등대는 1906년 3월 우도에서 점등된 무인(無人)등대다. 이는 현대식 등대로는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불을 밝힌 것으로 우리나라 등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후 일본의 군사적 목적에 의해 1915년 3월 마라도등대, 1916년 10월 산지등대 등 무인등대가 세워졌다.

해방 이후 1927년 추자항 입구 암초에 등대(등표)를 시작으로 1934년에 산지항(현재 제주항) 방파제에 2기, 1955년 이후 한림항, 비양도 및 차귀도 정상, 추자항 입구, 서귀포항(도등) 등에 등대가 설치됐고 해방이후 유인등대(산지·우도·마라도)가 운영돼 도내에서는 1962년까지 12기의 등대가 있었다.

아직 해야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 도대불의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남아있을지 모르나 그 의미와 기억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다시 맘이 급해진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경제부장·고미 교육문화체육부장·한권 사회부 기자·김오순 제주문화예술재단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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