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00> 노근리사건의 파장

2000년 1월 10일 사건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생존 피해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미 육군성 칼데라 장관 일행. AP통신 보도 파장이 컸다.

"피난민 적 취급하라" 미군 기밀문서 충격
 노근리사건 보도 이후 언론들 4·3에 눈길

노근리사건의 파장
1999년 9월 30일 「AP통신」이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집중 보도,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나흘간 충북 노근리 일대에서 미군이 전투기의 폭탄 투하와 지상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비무장 피난민들을 학살한 사건을 파헤친 것이다. 이와 관련 「AP통신」은 "피난민을 적으로 취급하라"는 미군 공식문서가 확인됐다고 보도하여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미국정부의 첫 반응은 미적지근한 것이었다. 미 국방부는 "보도내용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묘한 표현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AP통신」의 취재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치밀했고, 방대했다. 당시 기관총을 난사한 병사들의 증언을 포함해 관련자 100여명과 인터뷰를 했고, 공격할 수 있다는 명령을 담은 기밀해제 문서까지 입수했던 것이다. 탐사보도의 전형이라 하겠다.

이런 세밀한 보도 때문에 「뉴욕타임스」도 이례적으로 「AP통신」 보도를 1면 주요기사로 다뤘고, 「CNN」 등 미국의 주요 방송도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어물쩍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보도 다음날 윌리암 코언 미 국방장관이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 사건을 보고했고, 그 자리서 진상조사 방침이 결정됐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 국민만이 아니라 한국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이 노근리사건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였다. 피해자들이 미국정부의 공식사과와 손해배상 청구의 소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제주4·3, 거창사건 등과 마찬가지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사건 피해자인 정은용이 쓴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출간되면서 노근리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정은용과 그 아들 정구도 박사를 주축으로 '노근리미군양민학살사건대책위원회'도 결성됐다. 노근리사건은 「AP통신」 보도 이전에 이미 역사학 논문이 발표되는가하면 「한겨레신문」과 시사월간지 「말」지 등에 의해 그 진상이 보도됐다. 그러나 크게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AP통신」 보도는 미국정부만이 아니라 한국정부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근리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지시하면서 정부 산하에 부랴부랴 대책반이 구성됐다.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월까지 15개월간 노근리사건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동조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양국의 진상조사결과보고서와 한·미 공동발표문이 발표됐다. 미국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살상의 실재는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이거나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발뺌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조사결과를 토대로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했지만, 후속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이 사건은 제주4·3에도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 언론들이 미군정 하에서 발생한 제주사건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린 것이다. 때마침 추미애 국회의원이 4·3 관련 수형자 명부와 형살자 명부를 발굴, 공개한 시점이어서 더욱 화제를 모았다.

CBS(기독교방송) 인기시사프로 '시사자키-오늘과 내일'이 1999년 10월 7일 90분 동안 '긴급좌담-4·3 진상규명'을 테마로 4·3문제를 집중 방송했다. CBS 측은 "최근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 미군의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되고, 4·3문제도 수형자 명부 발굴 등으로 새 전기를 맞고 있어 4·3의 진상규명과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이 긴급 좌담프로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김칠준 변호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 추미애 의원, 현길언 교수(한양대)와 필자가 출연했다. 출연자들은 "제주4·3은 노근리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라면서 "진상규명을 위해서 정부와 국회, 그리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근리사건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후 미국정부의 소극적 태도에 반발해 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였다. 이 일을 주도한 정구도 박사는 "법 제정 과정에서 4·3특별법이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노근리사건특별법은 2004년 국회를 통과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 위원회가 구성돼 희생자 심사와 위령공원 조성사업 등이 추진됐다. 이 위원회에서 결정한 노근리사건 희생자는 226명(사망 150·행불 13·후유장애 63명). 10세 이하 어린이 68명과 61세 이상 노인 13명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실제 희생자 숫자는 400여명으로 추정했다. 피난민들이어서 인적사항을 파악하기 어렵고, 인우보증 등의 심사조건도 까다로워 누락된 희생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음회는 '거리로 나선 4·3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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