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16> 청와대 특별법 서명식

김대중 대통령이 특별법 제정 서명에 사용한 만년필을 박창욱 4·3유족회장에게 전달하고 있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 "큰 희생에 비해 작은 징표이지만, 민족의 비극을 제대로 밝혀 역사에 새기자는 뜻도 들어 있었다"고 적었다. 이 펜은 현재 4·3평화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DJ, 관계자들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서명
자서전에 "제주도민의 한 풀렸을 것" 기록

청와대 특별법 서명식
21세기의 벽두라 할 수 있는 2000년 1월11일 청와대에서는 특별한 법안 서명식이 거행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법률' 등 3대 개혁 입법 법안이 국회로부터 정부에 이송돼오자, 김 대통령이 법안 관련 단체의 대표와 관계 인사들을 초대해서 처음으로 공개 서명식을 가진 것이다.

의문사 특별법은 군부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뒤 주검으로 돌아온 최종길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숱한 민주 인사, 시민,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서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다. 의문의 주검은 말이 없고 당국에서는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나라가 방치했으니, 권력은 그들을 두번 죽인 셈이다. 의문사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422일간의 기나긴 천막농성을 벌여 쟁취해낸 특별법이다.

민주화 특별법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과 그 유족에 대해 명예회복과 적절한 보상을 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전태일 분신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3선개헌 반대 투쟁, 부마항쟁 등 우리 현대사에 굴곡진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특별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청와대 서명식장에는 이돈명·김창국 변호사, 이해동 목사, 송기인 신부,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 박종철의 아버지인 박정기씨 등 내로라하는 민주진영 인사와 사건 당사자 유족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또한 법무·행자·문광·노동·보건복지부 장관과 법제처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부 측 인사들도 대거 참석해 그 무게를 높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심혈을 기울였던 법률들이 제정돼 공개적인 서명식을 갖게 된 것에 보람을 느꼈던지 상기된 표정으로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각각의 법률이 서명될 때에는 해당 법안의 관계자들을 뒤에 서도록 해서 대통령이 서명했다. 4·3특별법을 서명할 때에는 박창욱 4·3유족회장, 양금석 4·3도민연대 공동대표, 강창일 4·3연구소장, 임문철 4·3연대회의 공동대표, 양조훈 4·3연대회의 공동대표, 양동윤 4·3연대회의 기획단장, 김두연 4·3유족회 부회장, 고희범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 등 초대된 제주 인사들이 차례로 섰다.

김 대통령은 서명에 이어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진실'은 있는데 '법'이 없어서 얼마나 탄식하고 울었는가? 이제 모두가 간절히 소망하던 법을 만들었으니 앞으로 잘 운영해서 제정된 법의 목적에 걸맞는 성과를 거둬 나가자"고 역설했다. 김 대통령은 특히 "제주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라고 선언, 우리를 감동시켰다. 

2010년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는 당시의 서명식을 회고하는 이런 글이 나온다. "서명에 사용한 펜을 관련 단체에 전달했다. 큰 희생에 비해 너무 작은 징표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런 민족의 비극들을 제대로 밝혀 역사에 새기자는 뜻도 들어 있었다". 그 만년필은 박창욱 유족회장이 받았다. 박 회장은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 때 만년필을 기증해 현재 서명서와 함께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또 4·3특별법의 제정 의미와 그후에 진행된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주4·3특별법의 제정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제주4·3사건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제주 지역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이었다. 나는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수십년 동안 '폭도', '빨갱이' 등으로 매도되어 살아온 것에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3사건은 현대사의 치부이자 살아있는 우리들의 수치이기도 했다. 이 법에 따라 정부는 진상규명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2003년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를 채택했다. 사건의 실체 규명을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위원회는 사실을 담아냈다. 이로써 제주도는 이념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50년간 쌓인 제주도민의 한이 조금은 풀렸을 것이다"

☞다음회는 '특별법 서울 보고대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