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제주4·3연구소 다랑쉬굴 유해 발굴 20주년 증언본풀이마당
고광치 옹 “살아있어도 없었던 사람…아직도 하늘 똑바로 못 봐”

▲ 고광치 옹
“조상들에게 죄 지은 사람이 할 얘기는 없습니다. 오늘까지도 제 할 일 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흔을 넘긴 유족의 낮은 목소리에 제주별자치도 소극장은 순간 숙연해졌다. 지난 1992년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해를 발굴했던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를 보며 가슴 끝부터 치밀어 오른 회한으로 울먹이던 분위기와 연결되며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제주4·3연구소(소장 김창후)가 제주4ㆍ3 64주년과 ‘제주시 구좌읍 다랑쉬굴 4·3유해발굴 20주년’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한 ‘4·3 증언본풀이마당-그 때 말 다 하지 못헸수다’에서 마이크 앞에선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비장함까지 비쳤다.

당시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다랑쉬굴로 피해야했는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그리고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사정들과 남은 자들의 아픔이 서릿발처럼 가슴을 친다.

다랑쉬굴에서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잃은 8살 소년의 기억은 64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했다. 고광치 옹(72·경기도 성남)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후 자신에게 쏟아진 불편한 시선과 욕설들로 아직도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한다”고 털어놨다. 어머니 역시 비슷한 시기 당시 세화초에서 벌어진 학살로 잃었다.

고 옹은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에 한달음에 제주로 와 양조훈 전 제민일보 4·3 특별취재반장을 만나 몇 시간에 걸쳐 그동안 깊은 옹이를 이뤘던 가족사를 얘기했던 기억도 되살렸다.

시신을 수습하고 봉분을 만들려던 유족들을 막아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고 옹은 “유족 누구도 수장을 원하지 않았지만 끝내 땅에 묻지 못한 것이 지금도 억울하고 원통하다”며 무덤 11개를 만드는 것이 힘들다면 하나 만이라도 만들자고 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또 “2년 전인가 4·3평화공원에 부모를 모시고 수목장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행방불명자를 위한 비를 세우면서도 정작 유해까지 찾은 사람은 안 된다고 했다”며 “그렇게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준 여러분들께 그리고 부모님께 아직도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말했다.

증언을 마친 고 옹의 표정은 시작 때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속에 있는 얘기를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는 본풀이 특유의 치유효과가 덕분이다.

이 날 행사에는 또 당시 고산성당 신부로 있던 남승택 제주신성여고 교장과 4·3연구소장이던 고창훈 제주대교수가 자리해 ‘다랑쉬굴 유해를 화장하고 수장을 강요하며 그 때의 흔적을 감추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남 신성여고 교장은 “유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외압을 직접 목격했다. 그런 사실이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여기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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