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26> 4·3기획단 구성 진통

보수 측의 이념접근에 대비한 기본전략
기본방향 설정부터 전문위원 간 시각차

제주4·3위원회는 2000년 8월 진상조사 작업을 벌일 전문위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어렵게 인원수를 확보한 전문위원 5명을 선발하는 절차였다. 응모자격은 박사 학위 소지자는 관련 분야 3년, 석사 학위 소지자는 관련 분야 6년, 학사 소지자의 경우 관련 분야 9년 이상 경력을 가진 자로 공고됐다. 신분은 계약직 공무원이었다. 

이 공모에 모두 9명이 응시해 그해 10월에 5명이 최종 선발됐다. 합격자는 김종민(전 제민일보 4·3취재반 기자), 나종삼(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 박찬식(전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문학박사), 양조훈(전 제민일보 편집국장), 장준갑(전 미 미시시피 주립대 강사·철학박사)이었다. 필자는 전문위원실 업무를 총괄하는 수석전문위원에 임명됐다. 실질적인 진상조사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곧이어 전문위원의 업무를 보좌할 조사요원 채용절차에 들어갔다. 이 역시 국회의원 당선자 등이 행자부장관과 담판을 벌여 조사요원 정원 20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공채를 하려고 보니 보수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일용직 신분이어서 월수입이 100만원에도 못미쳤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보수로는 우수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차라리 채용 인원을 줄이더라도 보수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공직사회에서 보수체계를 바꾸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한욱 지원단장이 장고하더니 최인기 행자부장관에게 보고한 후 결재를 받아 이 문제를 풀었다. 

결국 이런 보수 문제 때문에 조사요원 숫자를 15명으로 줄여 채용했다. 그해 11월에 이르러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15명 등 20명으로 진상조사 진용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전문위원실의 상위 조직인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의 발족이 단장 선임문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4·3특별법은 진상조사 기한을 제한하고 있었다. 즉, 위원회 구성을 마친 날로부터 2년 이내 자료를 수집·분석한 후 6개월 안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2년 6개월 이내에 진상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 시점은 어디까지나 '위원회 구성' 때부터였다. 위원회는 2000년 8월28일 출범했으니 기획단 발족 여부와 관계없이 진상보고서 작성 법정기한이 착착 흘러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문위원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진상조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계획 수립에 나섰다. 이미 밝혀진 4·3 관련자료 목록 작성, 국내외 진상조사 대상 기관 선정, 사건 체험자 증언조사 계획, 진상조사 및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계획 등에 대한 초안을 작성했다.

기획단 발족 이전인 2000년 12월28일 이한동 총리 주재로 4·3위원회 제2차 회의가 열렸다. 이때 진상조사의 기본 방향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계획이 이듬해 1월에 발족한 기획단에도 보고되었다. 순서로 보면 기획단에서 진상조사 방향을 먼저 논의한 뒤 위원회에 보고되어야 하지만, 기획단 출범이 지연되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상조사의 기본 방향은 두 가지로 정리됐다. 하나는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발발 원인, 진행 과정, 피해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규명하되 특히 특별법 취지에 맞게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부분의 규명에 역점을 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외에 걸친 광범한 문헌조사·증언조사, 피해자와 가해자 측 병행조사에 따른 진상규명 결과에 대해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에 주력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진상조사 핵심은 '주민 희생' 조사라고 강조했다. 위원회나 곧 발족될 기획단에 군경 측 인사가 참여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조사 과정이나 진상보고서 심의 과정에서 격한 논쟁과 대립이 예고되어 있었다. 보수진영에서는 4·3을 이념적으로 몰아붙일 것은 불보듯 훤했다. 따라서 '희생자'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니, 특별법 자체가 그렇게 설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기본 방향을 설정할 때부터 전문위원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필자를 비롯해 김종민·박찬식 등 제주 출신과 나종삼·장준갑 등의 전북 출신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이다. 특히 육사를 나와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고,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을 역임한 나 위원은 4·3을 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 결국 전문위원실 안에 5명이 같이 근무했기 때문에 고달픈 '한지붕 두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회는 '국내 자료조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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