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8> 미군 고문관 증언조사

   
 
  왼쪽부터 4·3 때의 9연대 고문관 시절(당시 28세)과 2001년 증언 때(81세)의 피쉬그룬드 모습. 오른쪽이 11연대 고문관 출신인 웨슬로스키.  
 

"미정찰기 동원 경비대와 함께 소탕작전"
"항상 노획무기보다 사망자 수가 많았다"

미군 고문관 증언조사
제주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2001년 10월 미국 현지에서 4·3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미군 고문관 출신 3명을 직접 만났다. 그들의 입을 통해 미군 장교들이 사태 진압에 나선 한국 군·경을 직접 지휘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4·3 연구가 진행되면서 미군 장교들이 4·3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하거나 개입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됐다. 제주도에서 미군정이 시행한 5·10선거가 무산되자 브라운 대령을 최고사령관으로 파견해서 진압작전에 나선 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군이 진압작전권을 갖게 된 일,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벌인 송요찬 연대장을 칭찬한 일 등 그 근거는 많다. 그럼에도 제주진압작전에 참여했던 미군 스스로는 과연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미군 고문관들에 대한 증언조사는 「한겨레신문」 허호준 기자의 추적 조사에서 시작됐다. 2010년에 제주대학교에서 4·3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그는 2001년 그 무렵에는 '4·3의 전개과정과 미군정의 대응전략'이란 테마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 관련 논문들을 입수해 분석하던 중 미군 고문관들이 생존해 있다는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어렵게 그들과 이메일 등으로 연락이 닿았고, 미국 현지 취재계획을 세웠다.

이런 소식을 접한 필자는 당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파견돼 조사활동을 하고 있던 미국 자료 조사팀(장준갑·김창후·양정심)에게 합동 조사하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했다. 허 기자의 취재활동(「한겨레신문」  2001년 12월8일자 보도)에 4·3위원회 진상조사팀도 합류하게 된 것이다.

합동조사팀은 그해 10월20일 버지니아주 한 한국식당에서 9연대 고문관 출신인 해럴드 피쉬그룬드(당시 81세)를 만났다. 그는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이 전개됐던 1948년 9월부터 12월 하순까지 9연대 고문관을 지낸 인물이다. 매릴랜드대학 출신인 그는 제주 주둔 기간에 중위에서 대위로 승진했다. 그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피쉬그룬드는 제주에서의 자신의 임무는 한국군에 대한 훈련과 보급, 때로는 자문하는 일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나는 그들의 회의에 참석해 인사와 군수, 작전, 정보 분야에서 미국군 방식을 도입하도록 애썼지만, 군수를 빼고는 성공적이었는지 모르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그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하고 군 작전을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고 초토화작전의 개념을 알고 있었음을 비치면서도 사전에 자신과 협의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그들은 항상 노획한 무기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왜 무기 수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하고 묻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피쉬그룬드는 "송요찬 연대장은 터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부하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그는 "작전 때도 터프했느냐?"는 질문엔 예의 사망자와 무기 숫자가 다름을 다시 거론하며 직답을 피해갔다. 그는 "제주도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이제 주민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1연대 고문관을 지낸 찰스 웨슬로스키(당시 80세)를 만난 것은 10월28일 플로리다주 그의 자택에서였다. 그는 1948년 6월과 9월 사이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제주도 주둔 제11연대와 제9연대 고문관으로 복무했다. 미 육사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는 공수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웨슬로스키는 "제주도에 부임했을 때 미 6사단 소속의 브라운 대령이 초기 제주사건 진압 책임자로서 참모인 포티어스 소령 등 7~8명의 장교들과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경비대가 제주도 전역에서 소탕작전을 벌일 때 나도 함께 나갔다"면서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미군 소속 정찰기도 작전에 활용했다고 증언했다. 

웨슬로스키는 그해 7월 11연대와 함께 수원으로 이동한 뒤 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장군이 자신에게 제주도 사태에 대해 물어와 아직까지 문제를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라고 답변하자 곧바로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라"고 명령해서 9연대 고문관으로 제주에 다시 오게 됐다고 증언했다.

진상조사팀은 10월25일 에드워드 조셉(당시 79세·1948년 7월부터 9연대 2대대 고문관으로 제주에서 복무)을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증언을 듣지 못했다. 조셉이나 피쉬그룬드는 한국에 있는 서종철 장군(4·3 당시 9연대 부연대장)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서 장군은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만났을 때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에 반해 9연대 군수참모 출신인 김정무 장군은 성의를 다해 증언했는데, 4·3 당시의 9연대 고문관 피쉬그룬드 사진도 김 장군으로부터 입수했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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