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9>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①

   
 
  2001년 4·3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발족 초기의 회의 모습. 왼쪽부터 박원순 기획단장, 김한욱 지원단장, 박동훈 지원과장, 양조훈 수석전문위원과 육군 소장 출신인 하재평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목차안 심의부터 양측 치열한 논쟁 거듭
초안작성 후 용어·내용 심의하기로 결정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작성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4·3특별법에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한 뒤 6개월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4·3위원회가 2000년 8월에 출범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점으로 한다면 늦어도 2003년 3월 이내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보고서 작성의 임무를 맡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은 기획단장 선임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으로 2001년 1월에야 겨우 출범할 수 있었다. 5개월가량을 까먹은 것이다. 기획단은 2003년 2월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작성될 때까지 모두 12차례 회의를 갖는 등 숨가쁘게 움직였다.

정부 관계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민간인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은 전문위원실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대상 선정에서부터 증언조사 계획과 국내외 자료조사 계획 등을 심의했다. 또한 자료 관리 데이터베이스 개발과 자료집, 증언집, 법령집 발간계획 등도 논의했다. 실질적인 진상조사 등은 상근체제인 진상조사팀에서 했지만, 그 추진상황은 기획단 회의에서 심의, 의결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수석전문위원인 필자는 2002년 4월 열린 기획단 제7차 회의에서 진상조사보고서 기본 구상안을 보고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의 종합적인 규명과 함께 인권침해 실태조사에 역점을 두어 편찬하되 종합진상조사보고서와 주민피해실태조사보고서 등 2권으로 엮을 계획임을 밝혔다. 제1권 종합조사보고서에는 사건의 배경, 전개과정, 주민의 피해 개요 등 사건의 전체 모습을 다루고, 제2권 피해실태조사보고서에는 피해 유형, 마을별 피해 상황, 희생자명단 등을 수록할 복안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획단에서 한 권의 보고서로 만드는 것으로 수정됐다.

기획단 회의는 진상조사보고서 목차 안이 상정된 2002년 8월 제8차 회의 때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보고서 체제뿐만 아니라 주요 제목의 선정, 용어 사용 문제 등 여러 현안들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격렬한 논쟁으로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보고서 목차 안은 그해 10월 열린 제9차 회의에서 잠정적으로 확정됐다. 이때 정리된 목차 안은 제1장 진상조사 개요, 제2장 배경과 기점, 제3장 전개과정, 제4장 피해상황, 제5장 조사결론, 제6장 권고 순으로 편성됐다. '미국과의 관계'를 독립된 장(章)으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토론이 있었으나 이 부분은 독립시키지 않고 각 장에 미국과의 관계를 적절히 기술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날 9차 회의에서도 논쟁이 거듭됐다. 보다 못한 박원순 기획단장(현 서울시장)이 "지금 현실적으로 보고서 초안은 전문위원들이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초안을 작성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용어라든지 구체적인 기술내용 등을 심의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중재안을 내놓아 통과시킨 것이다.

박 단장은 전문위원실을 신뢰하고 지지를 보냈다. 여기에 4·3역사를 연구해온 강창일(배재대)·김순태(한국방송대) 교수와 강종호 재경4·3유족회장 등이 가세했다. 그들은 4·3특별법 제정 정신을 살려 사건의 진실규명과 희생자 실태조사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국방부가 추천한 하재평(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유재갑(경기대 교수), 경찰청 추천 인사인 오문균(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 등은 남로당 책임문제 등을 내세워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하는 형국이었다.

특히 육군 소장 출신인 하재평 군사편찬연구소장은 국방부 입장을 대변하기로 작심한 듯 매우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목차 안이 잠정 확정된 다음날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잘해야지 잘못하면 언론에 터질 것이다. 「4·3은 말한다」식으로 기술하면 큰일난다.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진과 토의하는 시간을 갖자. 필요하다면 우리가 입력작업을 도울 수도 있다"고 제안해왔다. 필자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 뒤 보고서 내용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 작업이 전문위원들에게 맡겨지자 전문위원별 집필 분야를 정했다. 필자가 사건 배경과 조사결론, 김종민이 전개과정과 피해실태, 박찬식이 피해실태와 군법회의, 나종삼이 1950년대 이후 상황을 집필하기로 했고, 장준갑이 미국 관계 자료들을 맡았다.

그런데 막상 집필분야가 정해졌지만 너나 할것 없이 곧바로 집필에 몰두하는 전문위원은 없어 보였다. 관련자료만 뒤적거리는 수준이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버린 듯'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바로 그해 12월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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