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0>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②

   
 
  2003년 2월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이은 '참여정부'의 출범은 4·3진상규명에 더욱 활기를 불어줬다.  
 

'무장봉기' '초토화작전' 용어 놓고 설전
 노무현 대선 승리 4·3진영에 힘 실어줘

진상보고서 기획단 심의②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결과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2003년 3월부터 4·3위원회의 보고서 심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데, 그때에는 4·3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비롯해 당연직 위원인 6명의 장관이 새 얼굴로 바뀌기 때문이다. 어떤 성향의 정부가 출범하느냐에 따라 4·3위원회의 위원 진용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뜻이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40여개의 진실규명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했다.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적인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사의 반성과 진실규명작업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진상보고서를 채택한 위원회는 절반에도 못미쳤다. 법률상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어 있는데도 반대 세력의 저항에 부닥쳐 보고서 채택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경합을 벌였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이 후보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해 12월19일 치러진 대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대선 기간에 제주에 와서 "정부 차원의 4·3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이 잘못한게 드러나면 4·3영령과 도민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겠다"고 공약했다. 4·3진영은 그의 당선을 크게 반겼다.

이에 따라 대선 동향을 살피며 진상조사보고서 초안 작성의 속도를 늦췄던 전문위원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대선 다음날부터 전문위원실에서는 철야작업이 벌어졌다. 집필 방향에 대해서는 전문위원 사이에도 다소 논란이 있었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칙이 세워졌다.

첫째는 사실에 부합한 자료를 중심으로 내용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4·3 관련 기존자료나 증언이라 할지라도 왜곡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정밀한 검증과정을 거쳐 그 진실이 확인된 내용에 한하여 인용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4·3특별법의 입법 취지를 충실히 반영한다는 것이다. 특별법은 4·3사건의 핵심적인 정의를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주민 희생'에 키워드를 두어 인권침해 규명에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4·3의 구조적인 문제 규명에 역점을 두기로 한 점이다. 당시 남한사회의 정치상황과 국제적인 역학관계, 그리고 당시 독특했던 제주도의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여건을 총체적으로 살핀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전문위원들에 의해 집필된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2003년 2월7일 기획단 제10차 회의에 상정됐다. 회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4·3사건의 성격 문제를 비롯해서 발발 원인의 책임 문제, 남로당 및 미군의 역할 범위, 진압 작전의 실상, 계엄령과 군법회의의 불법성 여부, 집단학살의 책임문제 등에 대해서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군경측 단원들은 남로당의 개입 문제에 역점을 둔 반면 유족측 단원들은 학살의 실상과 그 가해자 책임 문제 규명에 비중을 두는 발언으로 날을 세웠다. 기획단 회의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용어는 4·3의 성격을 압축하는 '무장봉기'와 학살의 책임 문제가 제기된 '초토화작전'이었다.

군경측에서는 '무장봉기' 용어 대신에 '반란' 또는 '무장폭동'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반란'이란 용어를 쓰려면 우리 정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미군정이 우리 정부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무장봉기'도 "무장을 들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는 뜻의 중립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그대로 고수하자는 의견이 앞섰다. 국방부가 진상보고서 목차 초안을 제출할 때 '무장봉기'란 용어를 무심코 사용했던 것도 그들에게는 약점이 됐다.

국방부 쪽에서는 '초토화작전'이란 용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군사 작전에서 그런 용어를 쓴 적이 없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필자 등은 제주도에서 실질적 초토화작전이 감행됐고, 김익렬·김정무 장군 등이 '초토작전'이란 표현을 쓰고 있음을 들이댔다. 또한 1967년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 제1권에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초토화되었다"는 글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은 제11차 회의(2월13일)를 거쳐 2월25일 열린 기획단 제12차 회의에서 확정됐다. 이 심의 과정에서 일부 용어들이 순화됐다. 4·3 때 발효된 계엄령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되 불법 논란이 있는 점, 집행 과정에 법을 어긴 점을 다루는 것으로 수정됐다. 논란이 많았던 군법회의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조정됐다.

이 보고서 초안은 2003년 3월초에 4·3위원회 전체 위원들에게 배포됐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고건 국무총리가 취임했다. 그가 4·3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보고서 심의의 수장을 맡게 된 것이다.

☞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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