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2>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②

   
 
  2001년 8월 제주에서 열렸던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회의 모습. 앞쪽에 보수진영의 반대 물결을 막는 방파제 역할도 한 기획단장 박원순 변호사와 기획단 간사인 강창일 교수, 수석전문위원인 필자가 나란히 앉아있다.  
 

세 차례 소위 열어 보고서 초안 심층 검토
국방부측 '초토화' '연대장 책임' 삭제 요구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②
고건 총리가 주재하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소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린 2003년 3월24일, 당초 회의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던 나종삼 전문위원(중령 출신)이 출석했다. 국방장관이 강력히 요청했고 총리실에서 수용했다는 걸 알고 잠시 긴장했다. 필시 진상조사보고서 집필 업무를 총괄했던 나를 공격하고, 기획단 심의 과정의 문제점을 제기해 보고서 심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나 그 심의 과정이 불신을 받는다면, 그 다음 상황은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필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회의 직전 박원순 기획단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박 단장은 "알았다"면서 회의장에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회의 서두에 조영길 국방장관이 나서서 나종삼 전문위원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고건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 나 위원은 보고서 집필 과정에서 수석전문위원인 내가 전횡을 일삼았고, 제주 출신 전문위원들 중심으로 편향적인 집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수정의견을 제출했는데도 수석전문위원이 대부분 묵살했다고 토로했다. 회의장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박원순 기획단장이 나섰다. 그는 나 위원을 상대로 일문일답식으로 추궁해갔다.

"진상조사와 보고서 심의를 위해 기획단 회의가 모두 12차례 열렸는데, 나 위원은 모두 참석했는가?"
"모두 참석했다"
"내가 회의를 주재하면서 기획단 단원이나 전문위원의 발언을 한번이라도 제지하거나 못하도록 한 바가 있는가?"
"없다" 
"오늘과 같은 주장을 기획단 회의에서 제기한 바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기획단 회의에서는 한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이렇게 뒤통수치듯이 발언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리고 총리실은 기획단장인 나와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 소속인 전문위원을 임의로 출석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갑자기 불똥이 총리실 쪽으로 향하자 고건 총리가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나 위원이 나서서 해명하려 하자 오히려 고 총리가 "그만 됐다"면서 나 위원의 발언을 제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영길 국방장관도 더이상 나서지 않았다. 나 위원의 발언 해프닝은 거기에서 끝났다.

소위원회 회의는 주로 국방부와 한광덕 위원이 제기한 문제점, 수정 의견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일부 용어를 순화하는 작업도 진행됐다. 발발배경과 초토화작전이란 용어, 남로당 중앙당 지시 유무, 집단학살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의 책임 범위 등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고건 총리는 소위원회 제1차 회의에 이어 다음날 속개된 제2차 회의도 직접 주재했다. 두차례 회의에서도 결말이 나지 않자 3월28일 소위원회 제3차 회의를 다시 소집했다. 고 총리는 참여정부 출범 초기여서 국정 업무가 매우 바쁜데도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에 전력투구하다시피 했다. 다음날인 3월29일 4·3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위원들에게 통보돼 있기 때문에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소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쟁점 사항이 조금씩 타결되기 시작했다. 총리의 중재에 양쪽이 조금씩 양보했기 때문이다. 고 총리는 "보고서 결론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8쪽에 이르는 결론 부분은 직접 읽으며 축조심의를 시도했다. 고 총리가 의문사항에 대해 세밀한 질문을 하면 필자가 답변하는 식이었다.

고 총리가 "4·3 인명 피해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문해서 내가 그동안의 인명 피해에 대한 조사 자료와 인구 변동 통계 등 다양한 자료를 설명했더니 "그러면 되겠다"고 수긍해서 넘어갔다. 결론 부분에 "4·3사건의 발발과 진압과정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온다. 고 총리는 이에 대해 '미국'이란 표현이 너무 광범위한 의미이기 때문에 '미군정'으로 수정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내가 미군정 이후 대한민국 출범 후에는 군사고문단이 개입했다고 답변하자 "그러면 '미군정과 주한미군군사고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내용으로 수정하자"고 해서 그렇게 정리됐다.

소위원회 제3차 회의에는 국방장관을 대리해서 유보선 국방차관이 참석했다. 유 차관이 회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두가지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우겼다.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토벌작전'으로 수정하고, 집단 인명피해 1차 책임을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2연대 함병선 연대장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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