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42>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 ③

박원순, 사퇴 배수진 치고 평가부분 살려
전체회의 당일 이번엔 의결조항이 문제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③

   
 
  소위원회에서 심사했던 4·3진상조사보고서 초안. 심사 중이므로 외부 유출이 없도록 유념해달라는 '대외주의'가 박혀있다.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소위원회 제3차 회의가 열린 2003년 3월28일, 유보선 국방차관이 '초토화작전'이란 용어와 집단학살의 1차 책임이 두 연대장에게 있다고 한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고 끝까지 우긴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 무렵 국방부는 4·3보고서 문제로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성우회는 앞서 4·3보고서가 "군경의 진압작전을 국가폭력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과 군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중대한 잘못을 내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다각적인 보고서 통과 저지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유 차관은 "4·3사건 진압과정에서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가 없고, 또 그 책임을 물어 선배들의 실명이 버젓이 나오는데 국방부가 어떻게 동의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신들의 고충을 설명했다. 이에 반해 김삼웅 주필 등 민간인 위원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이때 '행정의 달인'이란 별칭이 있는 고건 총리가 또다시 중재에 나섰다. 고 총리는 "오늘 합의가 안 되면 내일 전체회의가 어렵기 때문에 중지를 모으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양쪽이 한발씩 물러서게 됐다. 즉, 초토화작전과 관련해서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는 표현으로 수정됐다. 초토화작전을 풀어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결론 부분에서 "집단 인명피해 지휘체계를 볼 때, 중산간마을 초토화 등의 강경작전을 폈던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문장으로 수정됐다. 즉 9연대장 송요찬과 2연대장 함병선의 이름은 뺐지만 그 내용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사실상 8쪽에 이르는 결론 부분 앞쪽은 물론 본문에 강경진압작전을 편 9연대장과 2연대장의 실명이 무수히 나오기 때문에 조금만 눈여겨보면 그 연대장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단지 한 문장 속에서만 그 이름이 가려졌을 뿐이었다.

'초토화작전'이란 용어도 인용 부호 속에서 살려냈다. 즉 김정무 장군의 "그 때에 초토화작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초토화작전 시기 9연대 군수참모였던,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는 김정무 장군의 이 귀중한 증언은 보고서(293쪽)에 그대로 실려 있다. 

보고서 심의 회의는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고건 총리는 결론 부분 마지막 8쪽을 읽던 중 "1948년 제주섬은 전쟁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 등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평가 부분에 이르러 눈길을 멈췄다. 곧이어 "법을 지켜야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는 표현이 나온다. 진상조사보고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기획단 회의에서도 이 부분이 논란거리였다. 그래서 당초 보고서 초안보다 다소 완화된 내용으로 수정됐다. 또한 기획단 회의에서 보고서 초안에 실렸던 '학살'이란 용어가 정부 보고서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에 따라 '살상' 등으로 정리됐지만 제노사이드(genocide)를 해석하면서 '집단학살'이란 용어를 그대로 살려온 터였다.

고건 총리는 "정부 보고서에 평가 부분까지 담아야할지 재논의를 해보자"고 말문을 열었다.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잠시 침묵이 흘렸다. 그 침묵을 깨고 박원순 기획단장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진상보고서를 어떻게 하든 통과시켜야 한다는 총리님의 뜻을 존중해서 많은 것을 인내하며 양보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방부 측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지만 그 쪽도 어려운 입장이기 때문에 가급적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보고서 핵심 부분까지 수정한다고 하면 기획단 회의를 재소집해서 논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기획단장인 저로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긴 박원순 단장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이에 민간인 위원들도 박 단장의 말을 거들었다. 회의 분위기는 다시 반전됐고, 논란이 될 뻔했던 평가 부분은 원문이 그대로 살아났다.

그날 소위원회 회의는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로써 총리가 직접 주재한 3차례의 소위원회는 모두 20여 건의 쟁점사항이나 용어를 수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막을 내렸다. 총리실은 다음날 열리는 4·3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할 회의 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샘 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필자는 전체회의 당일인 3월 29일 새벽에 받아본 총리실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보고서와 관련해서 4·3특별법 제3조제2항제1호로 의결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관한 사항'(제4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전 단계인 '관련자료의 수집 및 분석에 관한 사항'이었던 것이다.

☞다음회는 '진상보고서 위원회 심의'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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