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51> 4·3보고서 주요내용

4·3상황도 '폭동'에서 '무장봉기'로 정립
법률에 의해 작성된 '법정 보고서' 권위

4·3보고서 주요내용

   
 
  2003년 12월에 최종본으로 발간된 4·3진상조사보고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른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정의'를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로 정리했다.

정부 차원에서 채택한 4·3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논란이 일자 보고서 서문에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는 내용을 삽입했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사정에 의한 '전략적 표현'이었다. 필자는 앞의 글에서 4·3의 전체 모습과 성격을 함축적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2003년 3월31일자)가 그걸 눈치 채고 진상조사보고서의 4·3사건 정의를 인용한 뒤,  '4·3사건 성격 규정'을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즉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성격에 대해서 첫째,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 이후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있었고, 둘째,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는 1954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항쟁'이나 '통일정부 지향'이란 성격은 그 속에 녹여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다만 '4·3항쟁'이란 용어를 쓰는 순간 정부보고서로서의 통과는 요원해지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피해 갔을 뿐이다.

발발원인도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파악했다. 시점은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한 '1947년 3·1발포사건'이었고, 그 이후 육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극우적 행위, 응원경찰과 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 등이 있었으며, 이런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정부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경찰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는 없었다는 것이 조사 결론이다.

특히 대량 인명 피해의 결정적 요인은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고, 그 책임에 대해서 1차적으론 강경진압작전을 주도한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최종 책임은 계엄령 선포와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을 지시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정과 미 군사고문단에 있다고 지적했다.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 희생자 수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했고, 특히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1만5100명) 가운데 86%가 토벌대에 의해, 14%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으며 희생자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 여성 등 노약자가 전체의 33%를 차지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4·3 군법회의'를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불법적인 재판으로 규정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원인과 전개과정 못지않게 인권침해 실태라 할 수 있는 피해상황에 역점을 두어 기술됐다. 특히 인명피해는 집단 인명희생, 형무소 재소자 희생, 고문 실태, 연좌제 피해 등으로 구분됐고, 집단 인명피해는 △초토화 시기 살상 △도피자가족 살상 △자수자 살상 △함정토벌 △피난 입산자 살상 △보복 살상 △예비검속자 살상 △무장대의 살상행위 등으로 세분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적으로 1948년 제주 섬에서 이뤄졌던 일들은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 범죄방지 국제협약을 어겼으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고 지적했다.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재판 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자 역사적 과오임을 밝혔다. 또한 무장대에 의한 민간인 살상행위도 분명한 과오라고 지적했다.

당시 제주도는 세계 냉전체제의 최대 피해 지역이었으며, 바로 이런 이데올로기 문제가 4·3의 진상규명을 50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을 인권 중심으로 규명했다는 특징이 있다. 즉 과거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치우쳤던 4·3 문제를 인간의 존엄성, 인권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재조명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용어의 정리인데, 진상조사보고서에서 4·3의 전체적인 용어는 불가피하게 특별법 상의 '제주4·3사건'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면서도 4월3일 상황에 대해서는 종전 관변자료에서 사용했던 '폭동'이란 용어를 버리고 '무장봉기'로 정리했다.

4·3진상조사보고서는 법률 절차에 의해 확정된 '법정보고서'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보고서 확정 이후에는 공적 영역에서 4·3문제를 언급할 때에는 법정보고서의 용어를 준용해야 하는 '권위'를 갖게 됐다는 뜻이다. 보고서 확정 직후에 종전처럼 '폭동'이란 용어를 썼다가 항의를 받고 수정한 교육인적자원부의 '공문 파동'과 국방부의 '6·25전쟁사 파문'이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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