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제주미학기행
[김유정의 미학기행, 제주의 멋과 미] 1. 프롤로그

멋, 노동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상적 아름다움
미, '삶을 위한 예술'에 나타나는 생산자의 건강한 표현 

미학의 눈으로 보는 제주

▲ 제주 허벅
미학적 관점으로 제주를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모험적인 일이다. 모험이란 무모할 수도 있고,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 모험을 하지 않는 다면 우리의 문화는 정체되거나 왜곡되고, 의식은 그 자리에 머물고 만다. 모험이란 아무도 가지 않은 길과 같아서, 그 길을 나서려면 두렵고 낯설기도 한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미학적 성찰은 문명을 해석할 때 매우 중요한 눈이 된다. 역사를 다시 미학적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미라는 것이 보편성을 얻기에 힘든 것이지만, 그래도 누구나 공감하는 것은 인간은 늘 현실에서 미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미학적 대상이 되려면 인공적인 창작물, 즉 생활 속에 등장하는 기물이나 창작품이어야 한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미적 활동을 중시 여겼다. 미가 생활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또 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미와 같은 맥락에서 추를 외면할 수가 없다. 추는 미에서 다루지 못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재한다. 하나의 기물이나 건축물을 보면서도 미와 추의 시선은 교차한다. 왜냐하면 미는 언제나 계급성과 교육적 바탕을 깔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의 바람을 잘 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기 구덕을 볼 때 민중적 시선에서는 그것이 소박하면서도 자연미가 결합된 생활의 지혜가 보이는 반면,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면, 거칠고 조악한 비위생적인 원주민의 요람에 불과할 뿐이다. 초가도 아기구덕처럼 항상 두 개 시선의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 초가를 안식처로 삼는 사람들과 그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관점이나, 세금을 내는 사람과 세금으로 누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마치 묵가와 유가의 차이와 같다.

묵가(墨家)는 노동을 중시하며 생활 속에서 유용성의 미를 찾지만, 유가(儒家)는 예법을 중시하여 의례와 격식에서 미를 찾고 있다. 묵가는 보다 민중적인 생활의 미를 강조하고 있고, 유가는 지배자의 통치 질서에 부합하는 미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미를 보는 눈은 주체, 계급성, 당파성의 이념을 기반으로 국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그 바탕을 이루는 미의식은 근본적으로 계급성의 심연을 갖고 있다.

지배적 이념에서 벗어나야 하는 멋

▲ 고려 청자
멋과 미는 통일돼 있어서 그런지 멋을 말하려면 미를 거론해야하고 미를 얘기하려면 멋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멋이란 시대, 지역, 국가마다 다르다. 고려시대는 청자가 멋이 있는 도자기였고, 조선시대에는 분청이나 백자가 멋이 있었다. 그러나 멋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삿갓을 쓴 사람이나 중절모를 쓴 사람을 멋지다라고 할 수 있으며, 잘 차려 입은 사람이나 참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보고 멋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한복보다 양복 입은 사람을 멋지다고 한 적도 있고, 초가보다 콘크리트 집을 더 멋지게 생각한 적도 있다. 투박한 목가구나 돌하르방을 보면서도 멋지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멋은 의식(意識)과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멋에 개념에서 사람들은 정형화 된 것보다 살짝 흐트러진 듯한 위반의 파격성을 멋으로 보는가 하면, 풍취와 여유, 민중적인 취향을 멋으로 보기도 한다. 또, 멋을 참신성으로 보거나 자연에의 순응(順應)이라는 논자도 있다.

▲ 조선 백자
그렇다면 제주의 멋은 무엇인가. 멋의 개념이 시대와 지역성에 따라 다를 때 진정한 제주의 멋은 무엇인가가 논의의 초점이 된다. 지금까지 제주의 멋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소위 중앙에서 공수된 육지의 멋 개념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우리의 멋을 우리 스스로 멀리 유배시켰는지도 모른다. 온통 육지의 시선으로 본, 제주 문화의 해석으로 인해 제주는 모든 것의 불모지로 인식되었을 정도다. 그런 인식은 주체로서 제주는 사라지게 하고, 꼭 외세에 의존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섬의 원주민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소위 문화의 '불모지론'으로 제주를 보게 되면, 제주는 야만적인 땅이고, 누군가에 의해 교화돼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이런 불모지론은 과거 탐라와 제주를 지배했던 지배자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시각은 역사학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성과 진실성에 대한 기술(記述)이 역사학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제주 역사는 당파성을 바탕으로 다시 쓰고 새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멋에 대한 규명은 역사학의 과제와 함께 남겨졌다. 청자와 백자 때문에 허벅의 가치는 무시되고, 금관 장식 때문에 가죽모자와 가죽옷은 부끄러운 야만성으로 남겨졌다. 의례복 때문에 노동복인 갈중이가 촌스러움의 극치인양 여겨졌고, 농사와 물질과 마소를 키우는 일이 놀고먹는 무리들에 의해 모욕을 당했다. 유배인의 시선에 의지하다보니 모든 제주인의 생활은 짐승의 삶처럼 여겨졌고, 출세를 위한 한자는 권력이 되었다. 문자가 권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문자 없는 사회가 더 민중적인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한 사회는 평행선처럼 두 개의 대극점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민중에게 배우기는커녕 민중을 이용한 후 민중을 무시하는 풍토가 곳곳에 만연하다보니 건방지고 나약한 엘리트 의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가는 구름이 되었다.

이제 제주의 멋은 누구의 눈으로 본 멋이 돼서는 안 된다.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 그것의 진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을 지켜준 허벅이 가장 멋스러운 예술품이고, 사냥을 위해 추위를 막아준 가죽옷이 화려한 의례복보다 멋지다. 멋은 삶에서 찾아야 하고, 삶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규명돼야 한다. 나무를 엮어 만든 테우에서 노동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바다를 삶의 배경으로 삼았던 포작인의 눈물과 저항 정신이 바로 보인다. 벌거벗은 잠녀의 반나체가 관능적인 눈초리를 비켜서 기능적이고 생산적인 이유를 비로소 알 때, 잠녀들의 숨비소리에서 생명과 자연이 어우러진 노동의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진정 필자가 생각하는 멋은 '노동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상적 아름다움'이다.

제주의 멋과 미에 대한 미학적 복원

미국의 미학자 엘렌 디사나야케(Ellen Dissanayake)는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예술을 설명한다. 그는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theticus)」에서, 예술은 '중요한 대상들이나 활동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making special)'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예술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에 대처하고, 자연과 화해하는 기술(技術)'로서 '생존의 기술은 아니지만 생존을 강화(enhancement)시켜주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적 문양은 거칠고 위험한 자연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예술적 기술이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추상적 형식도 자연을 이해 가능한 형식으로 범주화시키는 예술적 기술이다라은 것이다. 또, 일정한 규칙을 가진 음악적 선율은 시간적 질서를 통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술이고, 거주지 주변에 돌을 쌓거나 조형물을 세우는 환경적 장식도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한다. 과학 기술이 덜 발달한 사회에서 예술은 항상, 집단의 가장 심오한 믿음과 관심사를 표명하고, 표현하고, 강화하는 제의의 한 부분을 이루며, 집단적 의미 부여와 단결력 강화의 수단으로서 예술이 결합된 제의는 집단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을 실행했다. 잠녀굿이 바로 잠녀 공동체의 생존을 강화시켜주는 의례라는 점을 디사나야케는 일깨워주고 있다.  

엘렌 디사나야케는 예술과 삶을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하는 개인적 기초로서 종중심적 견해를 채택할 때 우리는 자신과 예술 제작이 자연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술은 특별화하기로서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장려하고, 개발해야 할 인간의 정상적이고 필연적인 행동으로서, 진화심리학적 관점을 정리하면, 예술이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술은 생존이 여유로운 후에 즐기는 잉여의 활동으로, 소수의 여유로운 자만이 예술을 누리고 있다. 이 진화심리학의 견해는 예술과 생존의 분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 예술의 존재와 기능을 삶과 연결시켜주고 있다(김진엽, 2007).

엘렌 디사나야케의 견해인 '생존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점은 제주의 미를 생각하는데 매우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실제로 삶에 유용할수록 아름답게 만들려는 것이 인간이다. 생활의 기물도 아름답게 진화하며, 가장 가까이에 두는 기물은 제주어로 '곱닥?'것들이다. 신석기에 발견된 제주 옹기는 허벅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동안 생활용기임에도  미적으로 진화했다. 잠녀의 물소중이도 기능성과 함께 바느질 땀의 장식성이 진화했다. 동자석도 17세기 출현기의 딱딱함보다 영·정조 시대에 곡선의 단순미로 진화했다.

유배인을 예찬하는 문화론도 되짚어볼 일이다. 유배인들의 제주 예술에 대한 기여도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공동체에서도 권력자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정착한 유배인이 아닌, 죄인으로 왔다가 복권돼 떠난 유배인들이 가져온 문화는 진정한 제주인의 삶과 관련이 적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들이 도로 가지고 갈 육지의 문화인 것이다.

제주의 미가 퇴화하거나 사라지는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그 시기는 일본인들의 산업 제품이 제주에 유입돼 대체되면서 자연과 조응하던 제주인의 예술에도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문제는 제국주의와 함께 들어온 근대성이 제주의 장인들을 퇴출시켰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복원하지 못하는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제주의 멋과 미에 대한 미학적 복원을 유도한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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