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가파도 잠녀 1

▲ 가파도 잠녀들이 돌미역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세차례 태풍으로 해안 등 훼손, 올레 서쪽 코스 등 통행 제한
탄소 제로·색채 디자인 등 사업 러시에 몸살…'잠녀' 생존력은 강해
 
섬은 치유 중이었다. 세 차례 태풍이 지나치는 길목에서 강한 비바람과 억센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안았던 섬은 그저 무너지지 않았다. 누구나 어딘가 아픈 곳이 있듯 섬은 모든 것을 숙명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치유에 들어갔다. 남모르는 통증이 섬 곳곳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사람의 손으로는 그저 만져줄 수밖에 없는 깊은 생채기들이 흥건히 잠겨드는 사이로 숨비소리가 감겨든다.언제나처럼 섬이다. 주변의 온갖 소리들에서도 늘 혼자다. 돌풍처럼 스쳐가는 변화의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얘기들이 더디게 다가와도 보채지 않는다. 고즈넉하게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긴다. 금채기를 끝내고 공동양식장 해경을 앞둔 가파도의 10월 풍경은 그랬다.
 
▲ 강봉호 가파도 어촌계장
# 50명선 잠녀…뿔소라 수입원
 
한때 섬에서 치마를 두르면 모두 '잠녀'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몇 되지 않은 주민들 중 여성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바다밖에 없었다.
 
면적 0.84㎢, 인구 150여명, 해안선 길이 4.2㎞,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5.5㎞ 떨어진, 꼭 1㎞ 차이로 마라도에 '국토 최남단' 타이틀을 넘겨준, 가파도의 얘기다.
 
1842년 이후부터 사람이 들어가 살게 됐다는 섬에는 요즘 인기척으로 들썩인다. 청보리 밭이 넘실넘실 손짓하는 5월을 지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스산하지만 그 나름대로 운치 있게 섬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것도 지난 태풍으로 서쪽 길이 훼손되면서 반만 즐길 수 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섬을 관통해 부는 바람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다.
 
▲ 가파도 전경
섬 사람 중 아이와 노인을 빼고 일할 수 있는 여성은 모두 물질을 했던 까닭에 한참 때는 90명 넘는 잠녀들이 바다 밭을 노닐었다. 아니 노닐었었다. 2006년만 해도 어림잡아 76명이던 수는 지금 50명 선으로 줄었다. 더 늘어날 이유가 없다하니 이제는 매해 줄어든 숫자를 헤아려야 할 판이다.
 
여든을 넘긴 최고령 잠녀는 이제 멀리 바다를 내려다 볼 뿐 바다에 나서진 않는다. 상군 등 큰 잠녀들이 배를 타고 깊은 물에 나간 동안 나머지 잠녀들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작업을 한다. 상군이 줄잡아 25명. 이중 배를 타고 먼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잠녀는 15명 정도다. 대부분 50~60대인 상군 잠녀들 중에는 하루 100만원 상당의 수입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 이름만으로도 가치가 올라가는 가파도 뿔소라 덕분이다. 뿔소라 작업을 시작하면 '물질 좀 한다'하는 잠녀들의 경우 하루 평균 수입이 30만~40만원 대에 이른다. 대부분 어촌계가 수협을 통해 계통 출하를 하고 있지만 가파도어촌계즌 지난해부터 개별 판매를 하고 있다. 바닷물 온도가 바뀌면서 계통출하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워진데다 바다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섬 사정과는 도통 맞지가 않았던 까닭이다. 계통 출하에 따른 수수료도 만만치 않은데다 수급조절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몇 번이고 물질 중단 사태를 겪었던 탓에 저장·보관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1㎏에 5200원이니 계통 출하보다 단가도 나은 편이라 이곳 잠녀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는 귀띔이 따라온다. 
 
취재 중에도 강봉호 어촌계장의 휴대전화가 몇 차례나 울려댄다. 일본 수출 창구 역할을 하는 중개인과 다른 어촌계장들의 전화다. 한쪽은 지난해처럼 사업을 진행해도 되는가를 묻고 다른 한쪽은 가파도어촌계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내용이다. 사정을 아는 까닭에 일부러 모른 척하고 바다를 봤다.
▲ 가파도 표지석.
 
▲ 태풍으로 섬을 둘러 걷는 길이 많이 훼손됐다.
# 유명세·잇딴 사업 추진에 홍역
 
섬 여기 저기 아픈 흔적이 역력하다. 태풍 탓만은 아니었다. 가파도에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올레길이 나고 청보리섬으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가파도를 무대로 한 이런 저런 사업들이 쏟아졌다.
 
2013년까지 총사업비 25억원을 투입하는 국토최남단 가파ㆍ마라 어촌관광벨트화 클러스터 조성사업도 그중 하나다. 지난해 이맘때는 잠녀 불턱이며 공동우물, 할망당 등 가파도만의 독특한 자연과 생활문화를 아이템으로 '가파도의 보물이야기' 전통문화 복원 사업도 공개됐다. 탄소배출 없는 친환경 녹색 섬, 색채 디자인 사업 같은 말도 다 가파도를 설명한다.
 
바뀐 것도 있다. 전선 지중화 작업으로 전신주 130여개가 철거됐고, 어지럽게 널려있던 전선들은 일단 땅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신 250㎾급 풍력발전기 2기를 비롯해 99㎾급 태양광 발전설비가 '탄소 제로'를 상징한다.
 
섬 주민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던 5인승 승용차 4대 대신 전기자동차 3대가 섬을 누빈다. 건물과 돌담 2.5㎞를 정비하는 디자인 시범사업으로 섬 밖사람들의 눈이 가는 공간은 일단 은근한 베이지 색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엉뚱하게'터졌다. 전선 지중화는 했지만 케이블을 연결하는 통신사 전용 전선은 여전히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상태다. 몇 해 전 공을 들여 정비한 공공미술 작품 위로 한 가지 톤 색이 발라지는 예산 낭비의 현장도 속출했다. 문화재청이 민속마을 확대 사업의 일환으로 가파도를 점찍고, 섬과 바다라는 환경에 적응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해낸 '제주도의 축소판'이라 평하며 비교적 온전 남아있는 1910~1940년대 전통가옥의 가치를 높게 산 것을 비웃듯 이중 몇 개 동이 '오래된 폐가'로 규정, 정비됐다.
 
2012세계자연보존총회 일정에 맞추느라 지중화 사업 일부가 서둘러 진행되며 마을 가구 중 몇 집은 하수구 연결 미비로 인한 악취로 고생중이다. 지난 1년간 햇볕에 빨래를 널지 못했던 상황에 비하면 조금 사정이 나아진 편이란다.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의 기세는 그러나 밤 12시를 넘기기 어렵다. 늦은 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정전이 속출하며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색채디자인에 밀려 빈 집을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밀렸다. 심지어 마을 주민들 중에 '가파도의 보물 이야기'계획을 알고 있는 이가 드물었다. 한결같이 "또 누가 무슨 얘기를 했냐"고 되묻기 바빴다.
 
태풍 바람에 기억에 남아있던 불턱 자리도 사라지고 게석문화를 상징하던 할망바당도 한 1년 운영되다 접었다.
 
그나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해경을 앞두고 줄지어 있는 잠녀들의 물질 구덕 뿐인 듯 싶었다.
 
가파도 현역 잠녀 중 최고참인 김병화 할머니(70) 역시 해경을 앞두고 단단히 준비 중이었다. "금방 영양주사를 맡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앉아도 섬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는 상군 잠녀는 가파도에서 '왕언니'로 통한다. 할머니라 부르면 불호령을 내린다. 55년 넘게 누빈 바다다. 물질 밖에 몰랐고, 물질로 살았다. 할머니에게 바다는 '가파도'와 그리고 삶과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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