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76> 4·3희생자 유해 발굴 ③

   
 
  4·3평화공원 경내에 마련된 봉안당에 안치된 유해 납골단지들. 실명이 확인된 유해는 이름이 붙여졌고, 신원이 확인 안된 유해는 유전자 감식 확인번호가 붙여졌다.  
 

60여년만에 가족 재회 후 봉안당에 안치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명 종적 묘연

4·3희생자 유해 발굴 ③
2009년까지 발굴된 총 393구의 유해는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져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 유해와 관련성이 있는 유족들을 대상으로 채혈 작업도 진행됐다. 이렇게 모아진 혈액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송돼 유전자 감식을 거쳤다. 이와 함께 보철이나 골절 유무 등을 확인하는 체질인류학적 분석도 진행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희생자 신원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사업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이르자 여러 형태의 위령행사도 열렸다. 2009년 4월5일 유해 발굴 현장에서 제주민예총 주최로 '해원상생굿'이 벌어졌다. "짓눌린 육신 환생꽃으로 살아나소서"란 주제의 이날 행사는 사물놀이, 추모노래, 추모춤, 상생굿으로 이어졌다. 

최종 유해 운구에 앞서 6월8일과 9일 이틀간 유족과 일반도민들이 참여하는 발굴 유해 조문행사도 열렸다. 4·3희생자유족회 제주위원회(위원장 송승문)가 주관한 이 행사는 60년 동안 묻혔던 공항을 떠나는 영령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기 위한 제례였다. 제주시내를 관통해서 제주대학교에 이르는 운구행사도 엄숙하게 진행됐다.

결국 DNA검사를 통해 71구의 유해 신원이 확인됐다. 60여년만에 희생자와 가족들이 재회하는 특별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유해 발굴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전국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그런데 막상 발굴된 유해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일부 유족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제주공항에 묻혔을 것으로 예상됐던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명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란 6·25전쟁 직후 제1구경찰서(제주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종적이 없어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수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던 제2구경찰서(서귀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 일부가 공항 발굴 현장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땅속에 묻혔던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학살 암매장의 역사적 실체도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500명에 이르는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두가지 경우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번 발굴 작업에서 파보지 못한 공항 활주로 밑이나 활주로 근처에 묻혔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제주 앞바다에 수장되었을 개연성이다. 그 어느 경우든 실체적 진실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진실찾기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발굴 유해에 대한 사후 봉안 문제도 대두됐다. 우리에게는 1992년 발굴됐던 '다랑쉬굴' 유해들이 안장되지 못하고 화장 후 바다에 뿌려졌던 아픈 체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공항 유해 등이 발굴되면서 이번만은 예의를 다해서 유해를 엄숙히 봉안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았다.

2009년 3월 필자가 제주4·3평화재단 상임이사로 취임했을 때, 4·3평화공원 안에 유해 봉안관을 짓는 것으로 결론이 나서 그 준비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필자는 발굴 유해를 안치할 뿐만 아니라 유해 발굴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전시시설 마련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이 분야 전문가, 관계 공무원과 함께 중국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적이 있다. 중국측 주장에 의하면, 1937년 일본군이 자행한 전쟁 범죄에 의해 40일 사이에 중국인 30만명이 살해됐다고 한다. 이 기념관 속에는 유골 발굴 현장뿐만 아니라 유골 자체를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가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업무에 더 관여하지 못했다.

2011년 3월26일 제주4·3평화공원 경내에서 4·3유족회 주최로 '제주4·3 행방불명인 발굴유해 영령 봉안식'이 거행됐다. 필자도 민간인 신분으로 참석했는데, 그때 본 전시시설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 중 일부를 그 유족이 찾아간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 이 봉안당에 안치됐다.

양문흠 교수(동국대학교 철학과)도 DNA검사를 통해 60여년만에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내려온 그는 유해 봉안에 앞서 별도의 위령행사를 가졌다. 그때 아버지에 대한 회고와 험난한 삶을 살아온 여정을 진솔하게 밝혀 주위를 숙연케 만들었다. 철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는 유전자 감식 확인번호를 붙여 안치했다. 그나마 이런 봉안시설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 13개소에 대한 발굴사업을 벌여 한국전쟁 전후 희생된 유해 1617구와 유품 5600점을 발굴했다. 그 유해들은 현재 충북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진화위는 유해 안치시설이나 위령탑, 추모관, 추모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2010년 문을 닫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제주4·3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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