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변시지 화백이 지난 8일에 별세했다. 그의 부음을 듣고 먼저 떠오른 것은 '그 만큼 풍토성에 대한 감성이 뛰어난 예술가도 드물 것이다'란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기술한 바 있다. "변시지에 있어 제주도란 풍토를 제외한다면, 아니 제주도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풍토성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도무지 그의 예술을 안다는 것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로 보인다.…중략…그의 경우처럼 풍토와 예술세계가 융합돼 있는 예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 이렇게도 언급했다. "제주만이 갖고 있는 시공으로서의 원초성에 맞추어진 것이다." 그만큼 변시지를 이야기할 때 제주의 풍토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거의 변시지 예술과 제주는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화면은 누른 장판지를 연상시킨다. 그 위에 단색조의 검은 선획으로 그려진 그림은 마치 수묵화에 필적한다. 담백하면서도 고도로 절제된 감정의 편린이 화면에 치열하게 떠오른다. 쓰러져가는 해안의 초가, 초가를 에워싼 허물어진 돌담, 거기 어디쯤 서있는 해송,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허리 꾸부정한 남정네, 조랑말과 날아드는 까마귀, 해안엔 거친 파도가 넘실대고 저 멀리 바다엔 고깃배가 한척 떠있는 고적한 풍경은 그의 화면에 떠오르는 소재들이다.

이들 그림은 사생에 의한 풍경이 아니다. 그의 내면을 통해 걸러 나온 풍경이다. 그러면서도 그 어떤 제주의 풍경화보다도 제주다운 풍경이다. 여기에 그의 예술의 진면목이 있고 예술과 풍토의 관계를 재음미하게 하는 내면이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 떠오르는 풍경은 단순한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삶의 기록으로서의 풍경이고 그래서 역사가 된 풍경이다. 제주만이 지닌 인고의 삶의 역사가 없다면 변시지의 작품은 단순한 풍물적인 현실의 묘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변시지는 6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고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제주로 되돌아왔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나와 젊은 나이로 일본의 대표적인 단체인 광풍회전에 최고상을 수상함으로써 주목을 받게 됐다. 그러나 그는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50년대 후반에 영구 귀국했다. 제주에 정착하기 전에는 한동안 서울서 활동했다. 그의 화풍은 일본시대와 달리 변화를 겪는데, 서울시기의 작품은 고요한 궁전의 풍경이 주를 이뤘다. 이른바 '비원파'로 불려졌던 일군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비원파'는 비원을 중심으로 한 궁전 안의 풍경을 주로 다뤘던 손응성, 천칠봉 등 사실주의 화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변시지의 화풍은 고향인 제주로 귀향하면서 바뀌는데 그것이 예의 제주의 풍토성을 내면화한 것이다. 화면에 그가 지금까지 사용하던 화사한 색채는 사라지고 토방의 냄새가 훅 풍기는 누렇게 찌든 장판지모양의 화면이 기조가 되면서 제주 특유의 풍물이 시적인 절제의 구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뿌리를 둔 환경에 적응하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태어나 자란 풍토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승화시킨다.

자신을 에워싼 자연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그의 예술은 풍요로운 반응을 내보인다. 또 자신을 에워싼 환경이 각박하면 각박한 대로 그의 예술은 치열한 반응으로 인해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구가되기도 한다. 변시지의 예술은 이 후자에 해당된다.

지금은 풍요로운 섬, 관광지요 휴양처로 각광을 받는 지역이 됐지만 토박이 제주인에겐 아직도 아픈 기억과 한의 역사가 남아있다. 변시지의 예술은 이를 대변해준다. 그러기에 그의 예술은 잃어져가는 제주의 기억과 인고의 삶의 역사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에 그의 예술이 지닌 풍토성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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