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가 넘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까 식당에서 선원들이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그들 식의 만두인 만토우를 빚고 있다. 우리의 만두와 비슷하나 우리 만두의 열 배는 되는 크기이다. 해가 보이고 바다도 훨씬 잔잔해졌다.

그러나 이날 저녁때가 되면서 바다는 다시 거칠어져 로울링은 심해지고, 떠끄덕 떠끄덕, 탕탕탕 엔진의 소리는 우리를 닥달한다. 이때쯤 배는 파도를 얼마나 뒤집어 썼는지 짐을 잔뜩 실은 노새가 비 맞은 꼴이 되었다.

동승한 두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마주치면 고개를 내흔들고, 죽겠다는 소리가 전염병처럼 번져간다. 나는 마침 배에서 읽으려고 류시화 시인이 엮은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가지고 있어 나도 읽고, 그들에게도 읽어보도록 권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시련이 연단을 낳고, 연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로 격려하며 낙심하지 않도록 부추겼다.

18일 밤이 지나고, 사흘째인 19일 오후 한시에야 우리가 탄 배는 대동강 하류인 덕도(德島)와 석도(席島)가 보이는 광양만에 닻을 내릴 수가 있었다. 17일 제주항을 떠난 지 이미 44시간. 서툰 중국어나마 배 안의 중국 선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대학교 때 중국어를 배운 김선희 양뿐이다. 그들의 서툰 대화로 알아낸 내용은 이미 오후가 되어버려서 화물선을 안내할 예인선이 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여기까지 도착한 우리들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들은 이미 기다리는 데도 이력이 붙어가고 있었다. 오늘 못 나오면 내일이야 나오겠지. 그리고 이제는 내해여서 파도 때문에 겁을 낼 지경은 아니었다.

저녁에 우리는 선원들과 함께 맥주 파티를 벌렸다.

그러나 이튿날인 20일 새벽 8시쯤에 저쪽에서 보내온 무전으로 바람이 세어서 예인선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일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우리들을 이틀째나 갑문 밖에 세워 두다니 이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다.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중국 선원들은 타고난 만만디, 식당에 모여서 마작을 하기도 하고, 조타실에 올라가 사방 바다를 관망하기도 한다. 우리라고 별도리가 없으므로 그들과 어울려 망원경으로 사방 섬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오후 세 시가 지나니 바다는 잔잔해지고 햇빛도 나 은빛 바닷 물결이 눈이 부시다. 주변 섬들도 더욱 뚜렷이 보인다. 이곳의 섬들에는 나무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바리깡으로 아무렇게나 밀어 놓은 아이의 머리 같은 섬들 위에 고물을 뿌린 것처럼 눈이 내려 있다.

그런데 가장 반가운 것은 이쪽 바다에도 가마우지가 날으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남쪽 바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은빛 뱃대기를 드러내며 나는 모습은 참 반갑고, 귀하게 보였다.

대동강 어귀에 닻을 내린 다음에도 어떤 때 배는 심하게 요동치고, 어떤 때는 고요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니까 이같은 현상은 조류의 영향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배 속에서 거의 제대로 식사를 못하고 하루 두끼 정도나 라면 같은 것으로 떼웠는데, 이날 저녁에 비로소 <햇밥>과 라면을 끓여 식사다운 저녁을 했다. 그리고 침대에 들면서 선창에 실은 귤이 상하는 것을 걱정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우리를 얼마나 더 이 어귀에 세워 두려는 것인가! <오성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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