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 시인·논설위원

   
 
     
 
나는 이곳을 '소낭밧(소나무밭) 학교'라 부른다. 햇볕 좋은 날, 소나무 드리워진 소공원 정자로 삼삼오오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70대에서 90대까지. 툭 터진 정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그럼에도 대개 열명 이상 여인들이 늘 나와 담소를 나눈다. 누구는 음료수를 갖고 오기도 하고, 누구는 찐 고구마를 들고 온다. 여기선 온갖 세상사가 나온다. 자식들 이야기, 인기드라마도 나온다. 누구나 파란만장, 소설책 몇 권으로는 풀어내야 할 개인사들이 쏟아진다.

햇볕 한 톨도 아쉬운 계절. 할머니들이 돌담가로 대 이동, 웅크려 두꺼운 종이를 깔고 앉더니 그나마도 칼바람에 모두 일어선다. '정자에 문이라도 달렸으면 오죽 좋을까' 몇 번이고 바람만 하고 있었다. 소낭밧학교는 일시 폐교. 더 이상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도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리라. 다들 어디로 갔을까. 이들에게 햇볕보다 정작 그리운 건 아마 사람이리.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정이리.

물론 동마다 배치한 시설 좋은 마을복지회관들이 있다. 허나 그들에게 그런 복지시설은 먼 나라 이야기다. 가고 싶어도 쉽게 드나듦이 어렵다. 문턱도 높아 뵌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에겐 더 그렇다. 시골처럼 동선이 짧지 않은 시내권일수록 그렇다.

오래전 시골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쓸쓸함이 떠오른다. "죽는 것 보다 서러운 게 늙음이다. 늙지만 말아라"던. 지금의 노년세대들, 위로는 조상을, 부모를 모셔야하고, 아래로는 자식에 대한 교육열로 살아왔다. 그러다 만난 황혼. 노후준비를 할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연금이 어떤 건 지 모르고 살아왔다. 평생 뭔가를 누려본 적 없고, 당당하게 요구해 본 적 없는 세대들이다. 일제강점기와 제주4·3, 한국전쟁기, 가장 힘든 역사의 고개마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쳐야 했던 세대들이다.

바로 며칠 전 뉴스. 우리나라가 65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단다. OECD평균 12.4%보다 4배 가량 높은 50%에 육박한다. 대한민국 노인 절반은 상대적인 빈곤 즉 가난하다는 말씀. 5%대인 프랑스나 14%인 미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도 가장 빠른 나라가 됐다. 더구나 우리나라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올해 제주지역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3%. 특히 85세 이상 고령인구는 65세 이상 노인인구 대비 전국 최고란다.

노인 100세 시대라 했다. 말만 수명이 길면 무엇 하겠는가. 자식에게 부담 지우기 싫어 떠나는 노인들,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도 있다. 아프고 외로운 노년의 하루는 길고 길 뿐이다. 복지 예산은 펑펑 쓴다하는데 어디로 갔는가. 획일적이다. 유연성을 살리지 못한다.

복지라니! '국민이 행복한 나라'의 복지는 다 어디로 갔는가. 선거철만 되면 복지 운운하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잡으러 동네를 누비는 '한 표'들의 모습만 보인다. 허나 소외된 이들을 찾아 발로 뛰며 그들의 말에 진정 귀 기울이고 실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노인이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사람들마다 처해진 병의 경중, 상황이 다르다. 맞춤형 복지시대가 열려야 한다. 이 겨울, 복지의 사각에 선 세대들을 위한 작은 사랑방들을 적소에 만들어 주는 배려와 지혜를 제언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애민 편'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이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의지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뜻의 합독(合獨)을 권했다.

누구에게나 황혼은 온다. 누구나 황혼의 강은 건너야 한다. 그러나 자신은 당장 그 강을 건널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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