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제주미학기행
[김유정의 미학기행 멋과 미] 49. 한국 - 물의 문화사 <3> 대정의 물

▲ 대정현성 남문앞물
해안 용천수 여탕·남탕으로 경계 갈라 빨래와 목욕, 물 길어
'수월이못' 작고 둥근 구덩이 따로 있어 상수도 보급 전 식수
 
달밤에 목욕하던 산이물
 
모슬포에는 산이물이 동과 서에 있다. 동산이물(독산이물)은 송악산 해안에, 섯산이물은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 3리 109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닷가 암반 틈새로 시원한 물이 솟아난다. 썰물이면 물 솟음이 멈춰 바닥이 마른 채 있다가 다시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차오른다. 물맛이 좋고 시원하여 인근 5일장 주변 주민들과 하모 3리 주민들이 주로 식수로 이용했고, 여름날 밤에 목욕을 즐겼다. 산이물의 구조는 동쪽에는 여탕이면서 물이 나오는 식수통이 있어 허벅을 부릴 수 있는 팡돌이 있고, 서쪽은 수원(水原)의 지류를 이용한 남자 목욕탕이 있다. 겹담으로 여탕과 남탕으로 경계를 갈랐다. 주로 여성들은 빨래를 하거나 물을 길어 가거나 목욕을 하고, 아이들과 남자들은 물때에 따라 목욕만 한다.
 
산이물을 기점으로 정남쪽에는 '패물'이 있어서 간조가 심한 때인 5~8물 사이에 예비 잠녀들인 여자아이들이나 잠녀들이 몸을 헹구는 곳으로 사용한다. 동남쪽으로는 먹돌 같이 둥근 돌로 쌓았다고 하여 먹돌원이라고 부르는 원담이 있고, 그 원담 옆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먹돌원'이라고 부르는 물이 있다. 이 물은 주로 물놀이하던 남자아이들과 낚시를 마친 남자 어른들이 목욕을 하는 곳이다. 서쪽 100여m 반원으로 형성된 작은 만이 끝나는 코지 빌레 위에는 섯산이물 당이 있다. 섯산이물당은 잠녀와 어부들을 지켜주는 당으로 할망당, 갯당, 돈짓당, 해신당 등으로 불린다. 이 당 앞에 작은 용천수가 있는 데 '망알물'이라고 한다. 옛적에 후망을 보던 곳의 아래여서 이런 지명이 붙었을 것이다. 이 당의 모양은 사각형의 시멘트 돌담으로 둘레를 치고 돌담 북쪽방향에 시멘트 제단을 만들고 궤를 뚫었다. 이 당은 제일 아침 해뜨기 전에 잠녀들 개인별로 재물을 차리고 다녀온다. 이 당은 상모리, 하모리 잠녀들이 주 단골이고, 이 당을 경계로 동쪽으로는 하모리 바당이고 서쪽으로는 동일리 바당으로 나뉘는데 당 아래 쪽 망알물은 하모리 잠녀들의 불턱으로 이용되었다. 섯산이물 당이 있는 '망알'은 인근에서 비교적 높은 암반 지대인데 그 남쪽에는 여(礖)들이 많이 형성돼 있어 밀물이 되면 그 여가 보이지 않아 안개가 끼게 되면 해난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으로 대형 어선들이 여러 번 그 여에 부딪쳐 좌초되기도 했다.
 
산이물 동쪽 가까운 곳에 있는 지금 대정 5일장 자리는 원래 도살장이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산이물 바로 옆의 감젯공장(고구마전분공장)도 고구마 전분이 인기가 있을 때 가동되다가 1980년 이후 수입산 감자 전분의 경쟁력에 밀려 가동을 멈춘 후 공장이 철거되고 '감젯주시통'이 매립되면서 지금의 매립지 모습이 되었다.
 
'감젯주시'란 고구마를 갈 때 나온 찌꺼기인데 도새기(돼지) 먹이로 인기가 높았다. 도새기를 키우는 집에서는 리어카나 구루마에 감젯주시를 가득 싣고 와 돗통시 옆 도새기 여물통에 채워 넣곤 하였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온 후 감젯주시를 돗도구리에 삽으로 퍼서 넣어 도새기를 돌보곤 하였다. 감젯공장이 흥성할 때는 그 감젯주시통이 넘쳐 바다로 흘러들면서 인근 해변을 오염시키기도 했다.
 
산이물 동쪽 50m 지역의 매립지는 현재 5일장이 서고 있다. 대정 5일장은 1일, 6일, 11일, 16일을 단위로 선다. 산이물 정북(正北) 방향으로 100여m 지점에는 옛 천사보육원이 있다. 이 천사보육원은 1953년 10월에 설립 인가를 받은 보육시설로, 애초 1951년 인천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전쟁고아 20여명을 수용하였고, 1952년 사랑의 집을 별도로 마련, 전쟁고아 및 일반 고아 70여명을 보호하면서 보육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3년 1·4후퇴 때 고아들을 전부 승선시킬 수 없어서 그 중 20여명만 데리고 성산포로 피난, 후에 군부대가 있는 대정읍으로 이주하여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돌담집 80여평을 지어 터를 잡았다(제주특별자치도보육시설연합회, 2009).
 
필자의 유아 시절인 1960년대에는 탁아소를 운영하여 인근 모슬포 아동들의 어린이집 역할을 한 적이 있었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미군부대에서 장난감을 싣고 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미군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 기억이 난다.
 
산이물은 필자와 동네 친구들, 그리고 천사보육원 친구들이 놀던 곳이기도 한데 필자와 보육원 친구들은 고구마 줄기를 심는 장마철이 되면 구감을 파서 바닷가에 던져놓고 물놀이 하다가 그것을 먹었다. 고구마는 짠물에 적당하게 절여져 있기 때문에 단맛에 짭잘한 맛이 더해져 맛있게 된다.
 
민중의 지혜가 깃든 남문앞못과 두레물
 
남문앞못은 대정현성 남문루 앞에 위치한 못으로 풍수설과 관련이 깊다. 대정현 설치 당시 대정현 서쪽에 있는 모슬봉이 화산(火山) 형국이기 때문에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이 못을 팠다고 한다. 못 북쪽에는 줄곧 물이 솟았었지만 농업용 관정 때문에 물이 거의 솟지 않는다고 한다.
 
대정고을의 형국은 옥녀탄금형이라고 한다. 모슬봉은 유연하여 옥녀의 형국이고 단산 앞 금산은 거문고 형국이어서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이라고 전해온다. 대정고을 현성 안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뜰 정도로 깊은 샘이 있다. 그 깊이는 열다섯 발이나 되는 깊은 샘으로 모슬봉 옥녀의 하문(下門)이라고 불렀다.
 
민간에 회자되기를 이 물은 부임하는 고을 사또의 행정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정현감이 선정(善政)을 베풀면 항시 맑은 샘물이 용출하고, 만약 악정(惡政)으로 백성을 대하면 이 두레물은 금새 말라버렸다고 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민중들의 지혜로서 위정자의 치세를 평가하고, 항시 선정을 베풀 수 있는 감시 기능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 물은 거수정(擧手井), 두레물이라고도 하는데 두레박으로 물을 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샘이 말라버려 용출하지 않는 데 과도한 지하수 개발 때문이라고 한다.
 
수월이 못
 
대정현성 북문 300~400여m 지점에 수월이라고 불리는 못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정현성이 완성된 후 북문 밖에는 300여 가구 사람들이 살았는데, 일부는 성내로 들어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구억리로 가 다시 마을을 형성했고, 수월이 못 근처에는 오씨와 원씨가 살았다고 한다. 수월이 못은 꽤 규모가 커 시원스레 탁 트인 물이어서 볼만하다. 이 못은 약 1000평에 달하는 못으로 큰 연못과 작은 연못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못 북쪽에 두 개의 작고 둥그런 구덩이가 따로 있는데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에는 안성리 주민들이 식수로 쓰던 물이었다. 그 후 상수도가 보급되자 양어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며 지금은 연잎이 꽉 차서 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수월이 못은 새들의 먹이가 되는 잉어, 붕어, 미꾸라지가 풍부하다. 한때는 과다한 쓰레기 투기로 오염이 되었다가 마을 청년들의 정화 노력으로 지금의 못 모습이 되었다. 최근에는 유배길 일환으로 못 앞에는 정자가 지어져 있고, 못 주변에는 시문을 새긴 돌이 진열돼 있다. 못에는 수련, 검정말, 마름, 개구리밥이 많고, 수량이 풍부한 쪽으로 물매암이, 소금쟁이, 물달팽이, 참개구리, 붕어, 쇠백로 등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하늘을 비치는 못 너머 정남쪽으로 메산(山)자 모양의 단산이 한가롭게 누워있다. 동남쪽으로는 모자와 같은 산방산이 위엄을 보이고 서 있고, 서남쪽으로는 유연한 선을 자랑하는 모슬봉이 고즈넉하게 누워있다.
 
▲ 드레물을 설명하는 문화재기초조사위원 김창성옹(인성리)
제주의 마을 시리즈 8 「귀양객이 넋이 스민 대정고을」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못은 수월이라는 이름의 성질이 못된 기생이 살던 집자리인데 관을 등에 업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마음 고생을 많이 했고, 그 기생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 집터를 파서 연못을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수월이못 가까이 '독거미집터'라는 지명이 있는데 독거미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집을 짓고 살았던 터이다.
 
그러나 인성리에 사는 김창성 옹(81)은 수월이못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김창성옹에 의하면 수월이못 동북쪽에는 원래 오씨와 원씨, 기생 수월이가 살았는데 수월이가 집 가까이에 있는 불모지의 밭(현재의 수월이못)을 사서 우마급수장으로 쓰도록 마을에 기증했다고 한다. 동성리 마을 사람들은 물이 잘 고이는 그 밭에 물통을 파서 큰못을 만들었고, 마을의 강훈장에게 못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물으니, 강훈장은 "비록 천한 기생이나 마을에 이로운 일을 했으니 그 이름을 따서 수월이못이라 부르라"고 하여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한다고 했다.
 
김창성 옹은 수월이못의 물길은 알뜨르 대낭굴로 이어지는 큰 물길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물이 잘 고이는 불모지 밭이어서 그곳이 수월이집터라는 설은 낭설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또 독거미집터와 관련해서 김창성 옹은 독거미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해주오씨 입도조 3대인 오독검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터가 와전돼 '독검'이 '독거미'가 되었다고 증언한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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