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진상규명 활동 3. 제주도의회 4·3특위

▲ 1993년 11월3일 제주도의회의 청원서가 국회의장에게 전달되고 있다. 왼쪽부터 고석현·양금석·김영훈 도의원과 이만섭 국회의장, 양정규 국회의원, 강완철·이재현 도의원.
1993년 제주도의회 4·3특위 구성 만장일치 통과 
국회 4·3특위구성 청원·피해신고실 개설 등 성과
희생자 명단 실린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 발간
 
수십년간 금기시 됐던 4·3사건을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어 낸 것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지난 1991년 30년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제4대 제주도의회가 출범했고, 같은해 12월11일 첫 정기회에서 양금석 의원이 도정질문 과정에서 제민일보의 연재기획물 '4·3은 말한다'의 프롤로그를 소개한 뒤 4·3에 대한 도지사의 견해을 따져 물었다.
 
이를 시작으로 도의회내에서 4·3 공론화에 대한 의견이 모아졌고, 도의회 출범 이후 처음 맞는 4·3추모일을 앞둔 1992년 4월2일 도의회 의원 전체 간담회에서 도의회 차원의 4·3사건 진상특별위원회 구성키로 했다.
 
이어 같은해 4월13일 도의회내에 '4·3관계기구 설치 준비위원회'라는 소위원회가 꾸려졌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준비과정을 거쳐 1993년 3월20일 도의회 본회의에서 4·3특별위원회 구성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하지만 4·3특위 구성안이 통과됐지만 가동까지는 순탄치 않았다. 당시 공안당국 등의 외압으로 인해 의원들이 특위 위원 참여를 꺼렸고, 결국 3개월이나 걸려 가까스로 의원회 정수 7명을 채우고 활동에 들어갔다.
 
4·3특위는 4·3역사적 진상규명과 도민명예 회복을 위한 3단계 활동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는 기초조사 단계로 자료 수집, 희생자 신고 창구 설치, 각 마을별 4·3희생자 조사 등을, 2단계에서는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전문기관에 용역조사 의뢰해 4·3의 역사를 정립한 후, 3단곙에서는 도민 화합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특히 도의회는 4·3해결을 위해서는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1993년 10월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청원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해 같은해 11월3일 도의회 4·3특위 위원들이 국회를 방문해 이만섭 국회의자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에 따라 도의회는 1994년 2월7일 4·3피해신고실을 개설했고, 다음해 5월 1만4125명의 희생자 명단이 실린 '제주도 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어 1997년 1월에는 1만4500여명의 명단이 게재된 피해조사보고서 수정·보완판도 편찬했다.
 
4·3특위는 공공기관에서는 처음으로 공식기구로 출범해 4·3을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헌 기자

도의원 특위 참여 꺼려
7명 선정에 3개월 걸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출범으로 공식적인 4·3문제 해법 논의가 이뤄졌다"

김영훈 전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은 "1991년 30년만에 지방의회가 부활되면서 자연스럽게 도의회 내부에서도 4·3 문제 해결 논의가 시작됐다"며 "그 결과  도의회  4·3특위가 1993년에 출범했고, 당시 거론조차 쉽지 않았던 4·3문제를 공공기관에서는 처음으로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김 전 위원장은 또 "당시 도의회 의원들은 4·3 특위에 대해서는 찬성했지만, 정작 특위 위원으로 참여하길 꺼려했다"며 "결국 4·3특위 위원 7명을 선정하기까지 3개월이나 걸렸다. 그만큼 당시 공안당국 감시가 심했다"고 말했다.

또 김 전 위원장은 "당시 도의회 4·3특위는 4·3과 유사한 대만 2·28사건 해결방식을 배우고 와서 국회 차원의 4·3특위 구성을 청원했다"며 "또한 4·3 피해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4·3피해신고실'을 운영하는 한편 조사원들을 각 마을별로 보내 피해자 조사 등 4·3 진실규명에 최선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김 전 위원장은 또 "개인적으로 부친이 4·3 희생자 중 한 사람이어서 4·3특위 활동에 더욱 애착을 갖고 나섰던 것 같다"며 "억울한 희생자들을 위한 진상규명 활동에 4·3특위가 큰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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