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앤팡> 제주미학기행
[김유정의 미학기행 멋과 미] 56. 우도 돌담

▲ 우도의 설촌 초기 쌓았다는 상고수동 돌담
'상고수동 돌담' 3m 높이 겹담…우도 개척사 단면 보여줘
우도 돌담 어느 것보다 아름답고 가치있는 세계문화유산 
 
목축의 섬이었던 우도
 
우도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인용하고 가미한 「만기요람」의 글이 간단하면서도 흥미롭다. '인마(人馬)가 시끄럽게 하면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그 서남쪽엔 작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굴이 있는데 차츰 들어가면 누선(樓船) 10척을 둘 만하다. 물소가 늘 산다. 그 위엔 집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마치 태양이 빛나듯 별빛이 반짝이는 듯하다. 기후가 몹시 추워서 털이 쭈삣[송然·송연]하다. 전설에 "여기에 신룡(神龍)이 있어서 7·8월 사이엔 고기잡이배가 갈 수 없으며, 만약 가기만 하면 큰 바람이 일고 천둥이 울며 비가 쏟아져 나무가 뽑히고 벼를 상하게 한다" 그 위엔 닥나무가 많고 양치는 목장[羊場·양장]이 있다'고 했다. 
 
「우도지」에 의하면,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헌종 9년(1843)이라고 한다. 제주 사람들이 우도의 개간을 요청한 것은 그보다 20여년 전이었는데, 조정으로부터 개경 허가가 난 것은 1842년이고 방목하던 말을 다른 곳으로 모두 옮긴 해가 1843년이라는 것이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전에는 먼저 마소가 살았다. 우도에 목장이 설치된 해는 숙종 23년(1697)이다. 제주의 관리들이 목장을 신설하고 새로 부임한 병와 이형상 목사에게 목장을 참관하도록 간청하니 이 목사가 어려운 걸음을 하여 우도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남환박물」에 전한다. 우도에 목장을 설치한 관리는 제주목사 유한명(柳漢明:재임기간, 1696~1699)이다. 유 목사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우도에 목장을 신설할 당시 방목한 말의 수는 150여필이었다. 3년만에 45필이 죽어 105필이 남았으나 7년이 지나면서 말의 수는 늘어 260여필이 되었다. 우도 목장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이었다. 이형상 목사의 재임기간에 우도에는 두곳의 봉천수가 있어서 말과 목자들이 그것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이형상 목사는 우도 목장을 돌아보고 말이 번성하려면 물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간곡히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옛날 150여필의 말이 먹었다고 생각하는 물이 두곳 전해온다. 우도에는 용출량은 적지만 '산물'이라고 하여 땅에서 솟는 물이 하나 있고, 땅을 파서 빗물을 고이도록 한 '예물'이 있는데 목장 초기에 이 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후에 물은 6곳으로 늘어나 50리 넓이 목장의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 17년(1793) 2월11일에 제주목에 방목하고 있는 말의 숫자를 파악해보니 실제 남아 있는 말이 4886필인데, 그중에서 암말이 2966필이고, 수말이 1920필이었다. 당시 우도(牛島)에 실제 남아 있는 말은 310필인데, 암말이 141필이고, 수말이 169필이었다. 약 100년이 지났는데 우도 목장에 늘어난 말은 50필 정도였다.
 
돌담이 보배로운 섬
 
우도는 지형이 꼭 누운 소 모양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풍수지리로 보아 와우형(臥牛形)인 까닭이다. 우도는 동남쪽 쇠머리 오름 정상이 해발 132.4m로 가장 높고, 다른 곳은 대부분 해발 30m 이하로 비교적 평평한 편이다. 제주 섬 속의 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평가받고 있다. 섬 어디를 가나 아기자기한 풍경은 실로 아름다우며 우도에서 보는 제주 본섬의 경관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녹색의 보리가 점점 누런색으로 바뀔 즈음 바다는 더욱 차가운 색을 발산한다. 봄바람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날리듯 우도의 보리밭에선 물결이 일렁거린다. 배부른 누렁소의 등으로 내리는 햇살의 포근함은 평온의 세계 그 자체다. 문득 우도의 언덕에 서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오가는 뱃길의 분주함을 보노라면 하늘, 바다, 섬은 한 몸이 돼 내 자신이 그림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름다움에도 각각의 특색이 있는 법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미가 다르고 보는 방식이 다양하다. 미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조형물의 인공미가 있고, 자연이 만들어낸 자연미가 있는데 그것을 통틀어 누가 필자에게 우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아름다움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돌담이요!"라고 외치고 싶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조형물로서의 돌담이 자연물처럼 보이는 이유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 인공물의 자연스러움은 시간이 준 선물이라고나 할까. 돌담만이 아는 역사가 있음직하고 말 못할 가슴 아픈 사연 또한 돌담의 길이와 높이에 비례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닮는다. 어쩌면 우도 해안의 돌담은 우도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설명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축소해서 보면 송글송글한 땀방울을 쌓은 모습과 닮았다.
 
우도의 해안 돌담은 13㎞나 된다고 한다. 북쪽 지역의 돌담 높이는 무려 3m가 넘었다. 섬이 다 그렇듯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우도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 돌담을 높이 쌓았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바람에 불리지 않게 높은 돌담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담을 높게 쌓는 것이 문제다. 외담인 경우 어른 키를 넘기면 불안하다. 그래서 어른 키 이상의 돌담은 겹담으로 쌓아야 한다. 겹담으로 쌓는 이유는 높이 쌓아야 하고, 또 돌이 둥글어 외담으로 귀를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도의 겹담은 먼저 하단 부분을 넓게 겹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라오면서 점점 좁아지게 쌓는다. 돌담은 높이 올라갈수록 쌓기가 힘들기 때문에 돌담 안쪽으로 층을 만들어 그것에 올라서면서 윗돌을 계속 올려놓는 방식으로 쌓는다. 돌담은 주위의 돌을 이용했는데 해안의 돌이나 개간 시 밭에서 나온 돌로 쌓았다.
 
▲ 집안의 돌담이야기를 들려 준 윤석송·석우·길수씨 형제(사진 왼쪽부터)
현재 우도의 돌담 중 장관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 상고수동 돌담이라고 할 수 있다. 파평 윤씨 집안의 이야기는 우도의 돌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윤석송·석우·길수 형제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존하는 상고수동 돌담은 자신들의 증조부 4형제 중 한분이 쌓았다고 한다. 우도 설촌 초기인 160여년 전에 세화리에 살던 고조모가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4형제를 이끌고 우도에 들어와 정착을 했는데, 그 아들 4형제 중 한분이 주동이 돼 상고수동 돌담을 쌓았다고 자신들의 아버님께 들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우도의 해안에는 소라와 전복이 썩는 냄새가 날 정도로 많이 났고, 높은 돌담을 쌓기 위해서 해안의 돌 고망(구멍)에서 토종 고기를 소살로 쏘아 잡아먹으면서 힘든 돌일을 했다. 되도록 돌담을 높이 쌓은 이유는 오로지 곡식을 마련해야 작은 섬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높게 쌓았다고 한다. 높이 쌓을수록 밭 멀리까지 바람을 막을 수 있다. 우도 농업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상고수동 돌담은 오늘날 아름다운 우도 보리밭 풍경을 낳게 한 것이다. 실로 우도에서의 삶은 눈물겨운 개척사에 다름 아니다. 
 
우도의 옛집들은 나지막한 돌집들이다. 구불구불한 돌담의 올레, 지붕이 겨우 보일 정도로 높게 쌓은 돌담, 가뭄의 공포 때문에 물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숨길 수가 없다.
 
윤씨 형제들이 회상하는 봉천수 먹던 시절의 옛 이야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약 50년전 우도에 가뭄이 들자 봉천수의 물도 하루 한집에 허벅 하나만을 길도록 마을 스스로 제한급수를 했다. 제사가 있는 집은 쓸 물을 조금 더 주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되면서 봉천수를 먹던 시절보다는 물문제가 조금 나아졌다.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을 받아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떤 집에는 사각형의 시멘트 물통이 남아 있는데 물을 받아두었던 식수저장 탱크이다.
 
명품 우도 돌담 원형 보존해야
 
▲ 통시 돌담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가까이 있으면 가치를 잘 모른다. 제주의 소중한 많은 것들이 우리 스스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제주의 여러 문화들은 외부에서 가치를 먼저 인정받아야만 자신들이 인정하는 식민주의 잔재가 팽배하다.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얼이고 보배인데 여전히, 남 혹은 바깥으로부터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그때부터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것은 주체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돌담의 경우만 봐도 밭담이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받아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씁쓸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밭담만으로 제주의 돌담을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밭담은 농업문화유산만이 아니라 목축문화유산이기도 하고 생활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목축+농업+생활+해양의 돌담 모두의 연결점으로 밭담을 이해한다면 제주의 돌담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하는 당위성이 나온다. 실로 이것을 포기할 때 우리의 정책과 노력은 근시안에 머무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이제 우도의 돌담은 우도에서 보호되고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도의 자산은 자연이고, 그 흔하디 흔한 돌이고, 돌담이고, 돌집이고, 돌과 더불어 살았던 생활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도가 세계인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청정 자연과 제주의 문화가 있어서 그렇다. 특히 우도의 돌담 경관은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세계문화유산임에 긍지를 가져야 한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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