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부 산문 부문 최우수

▲ 박지혁
대정고 1년
미로같이 좁다란 골목길, 옥상에 올라서면 보이는 한옥들, 눈부시게 노란 은행나무들, 전주 한옥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 중 가장 번듯한 2층 벽돌집이 내가 유년을 보낸 고향이다. 주위에는 또래란 없고, 가끔 집 주변을 오가는 자동차들, 늙은 노부부가 다정히 양 손을 마주 잡고 오가는 골목과 어머니의 책들. 그것만이 나의 친구인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나른한 봄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부모님은 새벽빛을 맞이하며 아직 초록빛 이파리가 꼿꼿이 몸을 펴고 가로수 등허리에 업혀있는 전동성당으로 기도 드리러 나갔는지 집 안은 구석에서부터 고요함이 퍼졌다. 잠기운이 아직 남아있던 나는 할머니의 커다란 고무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청색 기와가 난간에 겹겹이 앉아있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연보라빛 여명이 느긋하게 비추는 옥상에는 연갈색 줄무늬의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고양이는 곧 나의 두 번째 친구가 되었다.
 
슬픈 듯 역동적인 활기가 비추는 두 눈, 보푸라기 같은 털들이 감싼 오똑한 귀, 털실같은 꼬리. 고양이는 그 후로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이해도 못하는 성서와 소설들을 읊었고, 점심으로 나온 생선을 살만 발라서 먹이로 주었다.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깊게 들어주는 친구가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그에게 온갖 좋은 것들을 주고 있었다. 가족들과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항상 옥상에서 노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나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이파리를 한 줌 가득히 쥐고 옥상에 올라가 고양이를 기다렸다.
 
"가을이 왔어, 길을 걷다보면 구린 냄새가 나더라."
 
나는 혼잣말을 하며 노오란 단풍을 머리에 꽂았다. 
 
"봄이 되면 대전으로 올라간다! 이제 초등학교에 간대."
 
공기업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는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가장 높고 푸르른 하늘에 이파리를 두둥실 띄우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해가 우뚝 솟았을 점심 무렵이 되어도 어째서인지 단풍처럼 아름다운 줄무늬의 내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유난히 길던 하루는 나의 마음도 몰라주고 야속하게 저물어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 날 잠들지 못하고 밝은 달빛에 옥상으로 올라간 나의 눈에는 촘촘히 하늘에 박힌 별들이, 수려하게 나풀거리는 구름들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털들이 갸르릉거리며 다리에 부비적거리던 그의 모습, 다소곳이 앉아 나의 재롱을 바라보던 두 눈, 호숫가에 비춰진 은하수같은 두 눈망울, 나의 두 눈에 쏟아지는 별무더기 속에는 힘없이 추욱 늘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 그가 묻혀 있었다. 
 
살면서 느닷없이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떠나는 것은 상대만이 아닌 나 자신일 수가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소중한 시간의 마지막. 그 순간이 마지막일지 모르고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영원할 수 없는 삶이 고귀한 보석처럼 찬란한 것은 식상한 일상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닐까.
 
내 생의 두 번째지만 가장 소중했던 친구에게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고맙기만 하다. 
 
그리운 나의 고양이에게.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