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수필가·논설위원

인도 사위성에 고타미 부인이 살았다. 그녀는 어린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하늘이 부인을 시샘한 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끔찍이 사랑하던 아들이 저 세상으로 뜨고 만 것이다. 부인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흐느꼈지만 아이의 생명을 되돌릴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고타미 부인을 찾아온다. "부처님을 만나보시지요. 그 분이라면 뭔가 도움을 줄지도 몰라요." 그제야 불현 듯 부처님 생각이 떠오른 부인. 큰 기대를 안고 부처님을 찾아간다.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다시 눈을 뜨기만 한다면 온 재산을 다 바쳐서라도 무슨 일이든 하렵니다." 부처님의 주문은 기묘했다. "그 아이를 살리려면 마을에서 여태껏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내십시오. 그 집에서 양귀비 씨앗을 얻어다가 갈아 마시게 하시오." 
 
고타미 부인은 마을로 내려간다. 아들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 무슨 일이든 못할까. 가가호호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런 집은 없었다. 그러던 도중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다시 부처님을 대면한다. 마을에서 깨달은 바를 말하며 가르침을 청한다. '죽음은 부인 아들에게만 들이닥치는 게 아니오, 살아 움직이는 것 모두에게 닥치지요. 재산이 많은 사람, 공덕을 쌓은 사람, 부인 아들처럼 귀여운 아이에게도 예고 없이 죽음은 찾아오지요. 마치 이 마을 저 마을을 엄습하는 재앙과도같이.
 
고타미 부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는 슬픔이었다. 단원고 꽃송이들이 무수히 꺾인 날이다. 온 국민이 애도해 마지않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당한 유족들로서는 어찌 한이 서리지 않을 수 있으랴. 아무나 붙잡고 '내 아들딸 살려내라.' 원망하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그런 부모의 심정을 어찌 모를까.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멘붕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나 어찌하면 좋은가. 사랑하던 아이들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을. 
 
이제 세월호가 침몰한지 5개월을 훌쩍 넘었다. 아직도 작업 중이지만 진도 앞 바다에서의 반가운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국가가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국가경제는 바닥이요 민생은 허덕이고 있으나 국회는 공전을 거듭할 뿐이다. 대화와 타협, 조율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국회가 실종된 지 오래다. 이 나라 정치가 세월호 문제에 휘둘려 어디로 표류하는지 쳇바퀴만 맴돌고 있다. 
 
세월호 유족들은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고혼이 된 아이들은 이 사건의 진실에 목메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왜 죽어야 했던가를 하루 속히 밝혀달라고 절규하고 있겠다. 이 진실을 밝혀내는데 정치적 이해관계나 불순세력이 끼어드는 걸 배격한다. 그래야 아이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 
 
그 전에 세월호 유족들은 할 일이 있다. 인도 사위성에 살았던 고타미 부인처럼 애끓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상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기조 위에서라야 비로소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폭행사건과 정치권 분열된 모습은 문제의 본질이 퇴색하면서 파생된 일이 아닐까 싶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진실 규명을 엄중히 해서 예부터 답습하던 부패의 사슬을 끊고 이전 같은 평온한 나라를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게 바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는지. 
 
비바람이 유난히 잦다. 하늘도 진도 앞바다의 슬픔을 어쩌지 못하는가 보다. 팽목항에서의 낭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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