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성 논설실장 겸 서귀포지사장

   
 
     
 
지난 6·4지방선거 때 원희룡 도지사 후보 캠프에서는 이색적인 각서가 나돌았다.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선거관계자들이 "선거가 끝난 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에 서명을 하고 원 후보측에 제출한 간단한 형식의 문서였다. 당시 원 후보가 전국적인 지명도와 함께 새누리당 원조 소장파로서의 정치개혁 이미지 등에 힘입어 각종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독주, 당선은 기정사실로 여겨질 때인만큼 원 후보의 여유가 반영된 제스처로 풀이됐다. 이와 아울러 선거 보은인사 관행을 타파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도민들은 신선한 충격으로까지 받아들였다.

원 지사는 또 취임 전날인 6월30일 공직자노동조합 간담회를 갖고 "선거공신에 따른 공직인사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면 된다"고 장담했다. 이어 다음날에는 제37대 제주도지사 취임사를 통해 "선거정치가 그동안 공직사회를 편가르기해 왔다"며 "저는 선거정치를 배격하고 공정한 인사를 할 것이다"고 재강조했다.

제주도는 이어 8월 말에는 도 산하 공기업과 출자·출연기관장들에 대해 일괄 사표를 받은 뒤 6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도는 기관장 교체 배경에 대해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경영능력의 검증을 통해 좀 더 적합한 인사를 선임, 기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인사를 보면 원 지사의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는 인상이 짙다. 제주도중소기업지원센터 본부장에 원 지사의 고교 동창이자 국회의원 시절 보좌관을 지낸 최측근인 현광식씨가, 제주에너지공사 사장에 새정치민주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새도정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이성구 전 제주도교통관리단장이 임명됐다.

도는 또 최근에는 제주신용보증재단 이사장에 강태욱 전 제주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임명했다. 강 이사장은 지난 도지사선거 때 현직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마을투어 등 원 후보의 선거운동을 대놓고 도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밖에도 도는 한 공기업 상임이사에 선거공신을 앉히는 등 전문성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선거공신을 챙기는 '제주판 3김시대'의 구태를 재연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같은 행태가 이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원 후보 캠프에 있던 한 인사가 현재 도 출자기관 대표이사 공모에 응모한 점을 들어 이미 그가 내정된 것이 아니냐는 풍문이 도청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이처럼 공무원사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허탈하게 만드는 낙하산인사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원 지사 측근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강 이사장이 원 지사의 고교 선배이자 친인척인 제주대 S모 교수와 개인적으로 아주 가까운데다 모 공기업 상임이사 및 도 출자기업 대표이사 응모자 등이 모두 S교수와 고교 동문이라는 점에서 전혀 억측으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원 지사가 그토록 강조했던 전문성과 경영능력 대신 사전 내정을 통해 편가르기와 줄세우기를 조장하는 이같은 일련의 인사가 S교수를 비롯한 비선 라인이 아니라 원 지사 본인의 의도대로 이뤄진 것이라면 오히려 문제의 심각성은 더해진다.

구성지 도의회 의장도 지난 3일 열린 제323회 도의회 임시회 개회사에서 "제주시장, 공기업 및 출자·출연기관의 장을 공모하면서 사전 교감이 있는 자를 응모하게 한 뒤 낙점한다는 여론이 있다"며 이는 신종 대도민 사기극이라고 원 지사를 맹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샐 수밖에 없다'고 도민과 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더 큰 꿈을 꾸는 것은 허황된 욕심이다. 원 지사는 우선 선거공신을 포함한 도청 집안단속부터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농협을 세월호 선장에 비유하고 의회를 보조금 횡령범으로 모는 등 지지자들까지도 등을 돌리게 만드는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언어 사용을 자제해야만 한다. 도민과, 도의회와 공감하고 소통할 때 기회는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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