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수필가·논설위원

   
 
     
 
2015 을미년 새해가 밝았다. 대형 사고로 얼룩졌던 갑오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새해는 '푸른 양'이라는 캐릭터로 우리들 앞에 성큼 그 의연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푸른 양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양은 무리를 이루며 생활한다. 한데 어울려 이동한다는 것은 유순함을 말하기도 하려니와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간다는 뜻이 배어 있다. 둘째, 푸름은 한자의 '乙'에서 시원했다. 그것은 희망을 전제함으로써 진취적인 기상을 담아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상이랄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속의 을미년은 한민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자취를 남겼다. 을미사변이 그것이다. 120년 전 구한말의 일이다. 일본은 조선을 넘보며 정치적 야욕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가 얼마나 허약했으면 일본 낭인 무리들이 황궁을 범해 안방 뒷방 가리지 않고 휘젓고 다니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우리의 무능함과 왜의 잔학함을 되새기게 되며 통분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네들은 반성할 줄을 모른다. 심지어 진실을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다고 우리는 과거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된다. 원망은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일이다. 과거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성하며 우리의 힘을 드높여 나아감이 어떨까.

지난 2014년은 통곡의 한 해였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소위 공복이라는 자들이 해야 할 일들은 젖혀두고 이기와 보신에 젖어 있었으니, 국가 기강이 바로 설 턱이 없지 않은가. 무역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랭크되며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하는 국가의 틀을 이루었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렇게 허약체질일 줄을 뉘 알았으랴.

고도 민주화의 길. 그것은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산의 정상을 오르려면 험한 계곡을 숱하게 넘어야 하듯 무릇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음이라. 해방의 혼란기와 6·25사변, 군사독재에 신음하며 이념의 혼란기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4·19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쟁취한 민주화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가 부둥켜안은 민주주의는 고귀하며 법률적으로도 완전무결에 가깝다고 여겼다.

2014년은 우리의 민주화가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 한해였다. 요번의 땅콩 회항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민주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음을 통감한다. 그 여정이 어찌 물처럼 순탄하기만 하랴. 곧은길만 뻗어 있는 게 아니다. 꼬불꼬불 휘어진 길도 가팔라 마냥 험준한 길도, 비탈길도 자갈길도 마다 않고 더불어 가야 하는 그 길이 민주화라는 숙명의 길이다. 

아침마다 뉴스를 듣다 보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많다. 글로벌 사회를 맞아 경쟁이 치열해선가, 혼돈의 세상이다. 각종 범죄와 폭력이 판을 치고 가족의 틀이 깨어져 아동과 노인학대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파당을 만들고, 민주라는 이름을 담보해 놓고 민생은 뒷전이고 당리당략에만 급급해 온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힘의 논리가 횡행하고 평행선만을 긋는다. 모두 민주화의 여정을 가로막는 암적 요소들이다.   

새해를 맞이했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나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요 겨울 바다는 잔뜩 독이 올라 세상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집체만한 파도로 으르렁거리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킨다. 엄동설한 속에 하늬바람은 우리의 옷깃을 파고들 것이고 한라산은 겨우내 설산을 이루겠지. 그러나 들판의 수목들은 모든 역경을 극복할 것이다. 아무리 모진 광풍이 몰아친다 해도 봄은 기어이 돌아오듯 우리의 민주화는 굽이굽이 고비를 넘으며 결국 정상에 발을 딛게 되리라. 2015, 푸른 양처럼 수용적이며 진취적 기상을 닮은 한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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